본문 바로가기

이무기가 쓴 칼럼/마감후

마감후19/‘미국인 탈레반’ 구명운동

지난 10일 영국 일간 가디언 일요판인 옵서버에 장문의 글이 실렸다. 기고자는 ‘미국인 탈레반’으로 낙인찍힌 존 워커 린드(30)의 아버지 프랭크 린드였다. 글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10년사를 보여주는 압축판이었다. 아버지는 10대 때 이슬람으로 개종한 아들이 겪은 고초와 테러와의 전쟁을 보는 미 행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았다. 아버지의 바람은 하나였다. 10년째 수감 중인 아들의 석방이다. 글을 읽고 나니 린드가 누구이며, 왜 미국인 탈레반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을까 하는 의문은 눈녹듯 사라졌다. 그러나 국가와 테러, 종교와 신념, 법과 정의 같은 단어들은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글은 린드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는 우리를 질책하는 죽비 같았다. 

린드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체포된 첫 미국인이다.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약 50일 뒤인 2001년 12월 초였다. 탈레반 포로 가운데 미국인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언론들은 그의 가슴에 반역자, 알카에다 전사, 테러리스트라는 주홍글자를 달았다. 그를 표지인물로 세운 뉴스위크는 ‘미국인 탈레반’이라고 불렀다. 

린드의 역경은 16살 때인 1997년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됐다. 이슬람교와 아랍어 공부를 위해 이듬해 예멘으로 간 그의 행적은 99년 잠시 귀국-2000년 다시 예멘행-그해 말 파키스탄행으로 이어졌다. 2001년 4월부터 가족들과 연락이 끊겼다. 가족이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은 것은 7개월 뒤였다. 그 사이에 9·11 테러가 있었고, 아들은 반역자가 돼 있었다. 미 정부의 설명은 연락이 두절된 동안 린드가 탈레반에 가입해 적대행위를 했다는 것이었다. 반역자 아들 소식은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 구명운동에 나섰다. 모든 여건이 불리했지만 아들을 믿었다. 테러와의 전쟁의 희생양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2002년 10월 선고공판에서 유죄를 인정한 대가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미군 병사들이 바델 전방 전투초소에서 탈레반의 기습공격에 응사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 AP연합뉴스

9·11 직후 미국인들이 보인 애국심과 분노를 감안하면 린드는 그 희생양일 가능성이 크다. 탈레반은 알카에다와 함께 미국의 최대 적이었다. 탈레반 가입은 곧 미국인에 대한 적대행위였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의 체포는 테러와의 전쟁에는 미국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이슬람 국가에 각인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린드가 총구를 겨눈 것은 아프간 국민을 상대로 만행을 저지른 북부동맹 군벌이었다. 이 점에서 린드는 미국의 아프간 정책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아프간이 옛 소련군의 침공을 받았을 땐 무자헤딘을 지원했지만 소련군이 철수한 뒤에는 탈레반을 밀었다. 9·11은 모든 것을 뒤집었다. 린드가 대항한 군벌은 하루아침에 미국의 동지로, 린드는 미국의 적이 됐다. 린드의 잘못이라면 이슬람에 심취하고,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테러와의 전쟁은 린드와 같은 희생자를 숱하게 낳았다.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린드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130여명은 재판 일정조차 잡지 못한 상태에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들의 부당한 처우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도 정책이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린드 아버지의 말처럼 아들의 석방은 10년 동안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모든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린드를 기억해야 하고, 그가 석방돼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