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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오바마의 두 얼굴, 무인비행기 대테러전 (2012 06/12ㅣ주간경향 979호)

 

6600 단어(A4 용지 15장 분량)에 이르는 이 기사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파키스탄과 예멘, 소말리아에서 무인비행기(드론)로 테러 용의자 누구를 제거할 것인지를 정하는 살생부(Kill List) 제작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직접 관여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의 무인비행기 프레데터가 2010년 1월 30일 작전수행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칸다하르 공군기지에서 이륙하고 있다. 칸다하르 | AP연합뉴스

“이것은 정보기관이 제공하는 적에 관한, 예멘에서 활동하는 서방과 관련된 알 카에다 요원 15명의 자료다. 얼굴사진과 약력은 고교 졸업앨범과 닮았다. 몇 명은 미국인이다. 17세 미만으로 보이는 여성을 포함해 두 명은 10대다.”

지난 5월 29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오바마의 원칙과 의지를 시험하는 비밀스런 살생부’라는 제목으로 실은 장문의 탐사보도 기사의 시작 부분이다. 6600단어(A4 용지 15장 분량)에 이르는 이 기사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파키스탄과 예멘, 소말리아에서 무인비행기(드론)로 테러 용의자 누구를 제거할 것인지를 정하는 살생부(Kill List) 제작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직접 관여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공격 빈도, 오바마 정부 출범 뒤 늘어


30여명의 전·현직 미 안보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기사에 따르면 오바마와 안보 실무자 20여명은 매주 화요일 백악관 상황실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살생부를 만든다. 미 국방부와 CIA가 정한 암살 대상자를 토대로 테러 용의자를 사살할 것인지, 생포할 것인지 오바마 대통령이 정한다는 것이다.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 담당 보좌관은 “이 같은 행동(살생부 작성)은 미국인에 대한 위협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나 우리 모두 사람이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회의에선 생포 가능성, 정보의 정확성, 위협의 긴박성이라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사살 대상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살생부 작성에 직접 관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CIA가 테러 대상자를 더 쉽게 제거하는 방안도 승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바로 ‘징후 타격(signature strikes)’이다. 이는 테러 용의자라고 의심받는 행동만으로도 공격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세 남자가 낙하 모의훈련을 하는 모습을 본다면 CIA는 테러범들의 훈련캠프로 여길 것이라는 농담이 있다.

CIA는 남자들이 비료를 트럭에 싣고 간다면 그들이 진짜 농부일 수 있는데도 폭탄제조자로 여길 것”이라면서 미 국무부 관계자들이 CIA가 테러 용의자들의 징후 기준을 너무나 느슨하게 정의하고 있다는 데 불만을 보였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인터뷰에 응한 전·현직 안보 관계자들이 오바마를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에 필요한 법적 절차는 피하면서 위험한 작전은 두려움 없이 승인하는 ‘역설적인 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결국 오바마는 이라크전쟁과 고문 반대와 같은 자신의 원칙을 버리고 테러 용의자를 상대로 한 비정규적 전투의 실용주의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했다.

국제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9·11 테러로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전쟁이라면 무인비행기 공격을 통한 대테러전은 오바마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무인비행기 공격은 2001년 9월 테러와의 전쟁을 이끈 부시 전 대통령이 2004년 시작했지만 2009년 1월 오바마 행정부 출범 뒤 급증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2년 동안 파키스탄에서 이뤄진 무인비행기 공격은 3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 런던의 시티대학교 탐사보도과의 집계에 따르면 2004년부터 파키스탄에서 이뤄진 미국 중앙정보국(CIA) 주도의 무인비행기 공격은 327회였다. 그 가운데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이뤄진 공격은 275회에 이른다.

파키스탄 국민들이 지난 5월 8일 페샤와르에서 사흘 전 미국의 무인비행기 공습으로 10명이 사망한 데 항의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페샤와르 | 신화연합뉴스


미국이 무인비행기 공격을 하는 이유는 미군 병사의 인명피해 없이 목표물을 제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예찬론자들은 미국 네바다주 사령부에서 원격으로 이뤄지는 무인비행기 공격이 정교한 정확성과 철저한 정찰활동을 자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폭이나 민간인 사망이라는 부작용이 일어남에 따라 국가간 외교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파키스탄은 지난해 11월 미국의 무인비행기에서 발사한 미사일로 자국 병사 2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보급로를 차단했다. 런던 시티대학에 따르면 2004년 이후 파키스탄에서 무인비행기 공격으로 사망한 숫자는 2464~3145명으로 추산되며, 이 가운데 민간인은 어린이 175명을 포함해 828명이나 된다.

‘무인비행기 공격은 잠재적인 전쟁 범죄’


미국의 무인비행기 활용 전략에 관한 논란 가운데 하나는 무인비행기 공격이 살인이나 전쟁범죄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유엔의 법적절차 없는 살인행위에 관한 유엔 조사관인 필립 알스톤을 포함한 국제법 변호사들은 무인비행기 공격에 의한 살인은 잠재적인 전쟁범죄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CIA에서 무인비행기 공격을 승인한 존 리조는 스스로 살인에 관여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 법무부 법률고문으로 오바마에게 법률자문을 하고 있는 한국계 해럴드 고(한국이름 고홍주)는 미국의 무인비행기 공격은 자위권에 따른 것이어서 국제법상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력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자위권은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반론이 따른다.

무인비행기를 활용한 대테러 작전은 급진적 테러리즘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다는 분석도 있다. 뉴욕타임스는 탐사보도 기사에서 무인비행기 공격으로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파키스탄과 예멘에서 주권을 침해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도발자의 상징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도 뉴욕타임스 보도 다음날 ‘무인비행기는 예멘에서 반발심을 자극한다’라는 기사에서 미군 공격이 주민들을 과격하게 하고 알 카에다 연계세력에 동조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 담당 보좌관은 지난 4월 무인비행기 공격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는 ‘정밀 타격’인 만큼 민간인 희생자는 “극히 예외”라고 말했다.

ABC방송은 뉴욕타임스 보도 다음날인 5월 30일 ‘노벨평화상 수상자, 드론 최고사령관 되다’라는 기사를 소개했다. 오바마가 2008년 대선 유세 당시 이라크전쟁 반대와 절차적 헌법 준수를 옹호한 점과 취임 첫해 테러 용의자에 대한 고문 금지,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및 수감자의 민간재판 등의 조치를 해 200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점을 들어 그의 변신을 꼬집은 것이다. 2002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주축이 돼 만든 반전평화단체 ‘코드 핑크’(Code Pink) 공동설립자 메데아 벤저민은 5월 30일 디시던트 보이스에 기고한 글에서 “미 정보기관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테러 용의자 명단 정보를 마치 야구선수 명단처럼 제공해 살생부로 활용하게 하는 것은 CIA가 관타나모 수용소에 테러 용의자를 수감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