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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3/양심수 브래들리 매닝을 위하여

조찬제 국제부장

 1991년 ‘유서대필사건’ 희생자 강기훈씨의 근황 보도(경향신문 9월29일자 1·9·10면)를 보고 참으로 안타까웠다. 누명을 쓰고 3년 옥고를 치른 것도 억울한데 명예 회복을 위해 학수고대하는 대법원의 재심결정 절차가 신청 접수 3년이 지나도록 진전이 없다니, 전문 법률지식은 없지만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국외자의 심경이 이렇다면 당사자는 오죽하랴, 이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한 외국인이 떠올랐다. 비리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미국 기밀자료를 제공한 브래들리 매닝이었다. 위키리크스는 미 육군 정보분석병으로 이라크에 근무하던 매닝 덕분에 2010년 미 기밀을 잇달아 폭로해 세계를 뒤흔들었다. 한동안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와 함께 인구에 회자되던 그의 이름이 언제부터인가 언론 보도에서 사라졌다. 세계 주류 언론들이 어산지의 스웨덴에서의 성폭행 연루 혐의를 대서특필하는 사이 관심권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매닝의 근황이 궁금해 뉴스를 뒤져봤다. 그의 이름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말이었다. 대법원이 강씨의 재심 접수를 신청한 지 3년이 막 지난 그 즈음이다. 어산지와 매닝의 변호인이 그의 재판을 언급했다. 어산지는 9월25일 피신지인 영국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한 유엔총회 화상 연설을 통해 매닝을 “애국자”로 부르며 미 행정부에 기소중지를 촉구했다. 그는 미 행정부 안에서 위크리크스를 국가의 적이라고 주장하는 관료들을 “터무니없는 신 매카시즘 추종자”라고 비난했다. 이틀 뒤엔 매닝의 변호인 데이비드 쿰스가 117쪽짜리 글을 블로그에 올려 매닝이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받았기에 군사법원은 그의 혐의를 취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쿰스의 글은 매닝이 처한 현재 사정을 잘 보여준다.

 쿰스에 따르면 매닝은 2010년 5월27일 간첩법 위반 등 22개 혐의로 체포돼 현재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군 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기소인정 여부 절차에 부쳐졌지만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 재판은 내년 2월4일 시작된다. 예정대로 재판을 받는다 하더라도 약 1000일(정확히는 983일) 동안 재판없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 미국의 재판 진행절차가 더디다고 하지만 시작조차 안 했다니 말문이 막힌다. 미국 수정헌법 6조(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군법 등은 모든 피고인에게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며 120일 안에 재판을 받도록 하고 있다. 쿰스는 재판 지연 이유로 검찰의 무능과 미 행정부의 불성실을 지적했다. 그는 2011년에만 7차례 신속한 재판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군 검찰은 120일 안에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신속재판 절차로부터 예외를 인정받았다고 주장했다. 미 행정부는 국가안보와 추가 조사 등을 이유로 미뤘다. 쿰스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지연시킨 것은 “매닝의 기본권을 조롱하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정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변명을 하는 것은 이 재판의 더러운 진실로부터 재판에 대한 관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서다. 정부의 이 같은 변명은 매닝이 845일 동안 재판을 받지 않고 구금돼 있는데도 정부는 여전히 재판을 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밝혔다.

 매닝을 강씨와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매닝은 실정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처벌을 앞두고 있고, 강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미 옥고를 치렀다. 그렇지만 두 사람에 대한 법적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을 터이다. 내부고발자 매닝은 양심범이다. 국가안보 관련 보도에 애국주의적 입장을 취해온 미국 주류 언론들은 매닝의 행위를 영웅주의에 취해 저지른 일탈행위로 매도하지만 말이다. 언론들은 그를 이라크에 파견해서는 안되는 문제사병으로 다뤘다. 기밀문서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고도 썼다. 심지어 동성애자라는 약점도 적시하며 그의 행위가 정신이상자의 짓거리인양 치부했다. 매닝이 온라인 채팅 사이트에 쓴 글은 이와 반대다. 그는 양심수를 자처했다. “당신이 공공 영역에 속하는 놀라운 자료를 워싱턴의 컴컴한 방에 저장된 서버가 아닌 곳에서 자유롭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신만이 알 것이다. 국제적인 토론과 개혁이 있길 바란다.…나는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길 원한다. 왜냐면 정보 없이는 공공으로서 토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이 글을 정신이 불안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이 쓴 것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매닝이 위키리크스를 통해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기밀과 국무부 외교전문을 공개한 결과 세상은 달라졌다. 전 세계는 미국이 이라크·아프간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세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똑똑히 봤다. 지난해 아랍권을 휩쓴 반정부 시위인 ‘아랍의 봄’도 그의 고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매닝이 전쟁범죄를 폭로하지 않고 다른 미군처럼 이라크에서 범행에 연루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그는 현재 자유의 몸이 됐을 것이다. 이라크법으로는 미군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간첩법을 비롯한 갖가지 법의 굴레를 씌워 그를 처벌하겠지만 그의 영혼은 자유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