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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10] 고르비의 선택, 김정은의 선택(181102)

냉전 종식기 미·소 정상 레이건과 고르바초프(고르비)는 모두 다섯 차례 만났다. 1985년 11월19~21일 스위스 제네바 정상회담이 시작이었다. 강경 냉전 전사 이미지의 레이건과 젊은 새 지도자 고르비의 첫 만남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던 만큼 별 성과는 없었다. 가시적인 성과라면 고르비의 워싱턴 방문 합의 정도였다. 첫발은 내디뎠지만 후속 회담은 쉽지 않았다. 두 정상이 1986년 10월11~12일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약 11개월이 걸렸다.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당시 실패한 회담이었지만 훗날 냉전 종식의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축의 가시적인 첫 성과인 중거리핵전력(INF)협정이 체결된 3차 워싱턴 정상회담(1987년 12월)의 징검다리가 됐기 때문이다. 군축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정하기 위한 베이스캠프였던 셈이다.

제네바 회담 이후 레이캬비크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두 정상은 제네바에서 핵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점과 대화를 규칙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지향점은 달랐다. 고르비는 군축에, 레이건은 ‘스타워스’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에 집착했다. 미국의 리비아 공습, 양국 간첩사건 같은 악재는 대화 추동력을 약화시켰다. 식어가던 정상회담에 대한 열정을 살린 건 두 가지였다. 우선 두 정상의 대화 의지였다. 레이건은 “그들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자”며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했다. 고르비도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낡아서 좀약 냄새를 풍기고 있다”면서도 “이 모든 낡은 옷을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고르비를 만나 중재에 나선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역할도 컸다. 결국 고르비는 9월19일 정상회담을 하자고 미국에 제안했다. 레이건은 사흘 뒤 유엔총회 연설에서 이 사실을 공개하고, 일주일 뒤 아이슬란드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밝혔다. 10여일 뒤 두 정상은 만났지만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지”라는 기약 없는 말을 남긴 채 헤어졌다. 최대 난관은 SDI였다. 레이건은 핵전쟁 두려움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다. 고르비는 미국의 기술발전에 대한 두려움 탓에 양보할 수 없었다.

레이건과 고르비의 정상회담 과정을 보면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 비굴할 정도로 보이는 고르비의 양보다. 고르비는 취임 한 달 뒤인 4월에는 대륙간탄도비사일(ICBM) SS-20의 유럽 배치 중단을, 7월에는 6개월간 핵실험 중단을 선언했다. 하지만 레이건은 그해 8~9월 두 차례 핵실험으로 화답했다. 고르비는 레이캬비크에서도 두 가지를 양보했다. 모든 전략무기 자료 공개와 강제적인 현장 검증이었다. 특히 소련의 전략무기 자료 공개 언급은 미국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고르비의 이 같은 태도는 개혁을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는 또 레이건을 만나며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소련의 안전은 미국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미국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한 셈이다.

지난달 7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4차 방북에서 합의된 북·미 2차 정상회담 조기 개최가 늦어지면서 조급증이 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끝난 지 5개월도 되지 않았다. 미·소 정상이 두 번째 만나는 데 11개월이 걸렸다. 조바심을 낼 이유가 없다. 북한 핵 신고와 검증이 교착상태의 원인이라면 고르비의 행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국제사찰 약속 이행은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마침 북한도 국제사찰을 준비하고 있다지 않은가. 내년 초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도 가시화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 문제는 속도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조차 이미 여러 차례 북한 핵실험이 없으면 오래 걸려도 상관없다고 한 마당이다. 레이건이 고르비를 만날 때마다 한 말이 있다. “신뢰하라, 그러나 검증하라”는 러시아 속담이다. 말에 속지 않겠다는 의미일 터이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트럼프의 생각도 레이건과 다르지 않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성급했다는 비판을 받은 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은 미·소 군축 협상 과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70년간 미국과 줄다리기를 해온 북한이지만 손을 먼저 내밀지 않았던가. 필요한 것은 서로 신뢰를 다질 수 있는 시간을 쌓아가는 일이다. 미·소 정상회담에서 슐츠 미 국무장관과 함께 셰르파 역할을 한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은 “슐츠와 자주 만났는데, 35회 정도 넘으면서부터 정확히 계산하지 못하게 됐다”고 술회했다. 레이캬비크 회담 과정에서 보듯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도 적극 환영할 일이다. 무엇보다 레이건의 인내심과 고르비의 냉철한 현실인식이 없었다면 군축과 냉전 종식은 훗날의 이야기가 됐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