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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공립학교 흑백통합배정 ‘재심판’ (2006 12/19ㅣ뉴스메이커 704호)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역사적인’ 판결을 거론할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있다. ‘브라운 대(對)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에 대한 판결이다. 반 세기 전인 1954년 5월 17일 미 대법원이 내린 이 판결의 요지는 그동안 공립학교에서의 백인과 흑인의 분리교육은 위헌으로 흑백 인종간 통합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판결은 미국 민권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1951년 켄터키주 토피카에 살던 흑인 올리버 브라운은 열살 된 딸이 왜 집에서 네 블록 떨어진 ‘백인학교’를 두고 1.6㎞나 떨어진 ‘흑인학교’에 다녀야 하는지 불만이었다. 당시만 해도 흑인과 백인은 ‘분리돼 있어도 평등할 수 있다’는 1896년 대법원의 인종분리 합헌 판결 때문에 각각의 학교에 다녔다. 브라운은 딸을 가까운 백인학교로 전학시키려 했으나 학교측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같은 불만을 품은 학부모는 브라운만이 아니었다. 브라운을 포함한 학부모 13명은 토피카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으로 맞섰다. 미 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으로 불린 이 소송을 오랫동안 심리한 끝에 9 대 0 전원일치로 ‘흑인과 백인에게 분리 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기존의 판결을 뒤엎는 판결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흑백 인종간 반목이 심했던 남부 주를 중심으로 공립학교에서 흑백 학교통합배정 정책이 자리잡게 됐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인종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의 대표적인 사례인 흑백 인종 학교통합배정 정책이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미국 주 가운데서 흑백 인종간의 거주지역 분리가 심한 켄터키주 루이빌과 워싱턴주 시애틀의 소수 백인 학부모들이 학교 통합배정 정책에 반기를 들고 해당 교육위원회를 피고로 미 대법원에 위헌 소송을 제기, 대법원이 심리에 들어갔다.

흑백 인종간 학교통합배정 정책 지지자들이 4일 미국 워싱턴DC 대법원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연합뉴스


50년 전 흑백 입장 달라져

이번 소송을 낸 학부모는 학교 통합배정 정책이 미국 수정헌법 14조 ‘평등보호조항’을 침해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루이빌이나 시애틀 교육 당국은 학생들이 어떤 학교에 들어가더라도 동등한 교육을 받는다고 반박한다. 또 학교의 인종 통합을 위한 배정 정책은 비록 일부 학생의 학교 선택권을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사회에는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문제가 된 시애틀 교육당국은 교등학교 입학생들에게 학교선택권을 보장하되, 입학 대상 학생의 10% 범위 안에서 인종간 균형을 맞추는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01년의 경우 백인 210명, 흑인 90명이 자신들이 원하는 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루이빌의 공립학교는 흑인 배정 비율을 15~50% 유지하고 있다.

50여 년 전 ‘브라운 사건’과 이번 소송의 출발점은 다르지 않다. ‘자식들이 왜 가까운 학교를 두고 멀리 가야 하는가’가 핵심 쟁점이다. 다르다면 50년 전엔 흑인이 소송 당사자였지만 지금은 백인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학교 통합배정 정책과 관련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비록 5대 4이긴 했지만 ‘지지’ 입장을 보였다. 2003년 미시건대학의 학생 선발과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도 미 대법원은 기존 정책이 설혹 백인 학생에게 불이익을 안기더라도 인종적 다양성을 제고하기 위해 학생 선발시 인종을 필수 ‘요소’로 검토해야 한다고 5 대 4로 판결했다.

하지만 최근 미시간주가 주민투표를 통해 교육·고용 등 공공서비스와 관련한 차별철폐조치를 폐기하는 등 미국 내 백인사회를 중심으로 흑백 통합교육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이다. 더욱이 현 대법원 판사들의 성향에 따른 구성비는 3년 전과 다르다. 미시건대학 사건 당시 대법원 판결은 찬성 5, 반대 4에서 보듯 현 정책을 지지하는 쪽이 다수였다. 하지만 그 후 학교 통합배정 정책에 적대감을 보여온 존 로버츠(대법원장), 새뮤얼 얼리토 등 보수파 인사 2명이 새로 대법관에 임명됨에 따라 무게중심은 ‘반대’ 쪽으로 기운 감이 있다. 게다가 2003년 판결에서 다수의견을 낸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도 은퇴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법원이 50년 동안 유지한 통합배정 정책에 대한 수정 또는 폐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법원 판사 입장표명 4대4 팽팽

지난 12월 4일 열린 이번 소송에 대한 첫 심리는 달라진 대법원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AP통신,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대법원 판사 9명 가운데 과반수인 5명이 현 학교 통합배정 정책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날 심리에서 원고 및 피고측 변호사에 대한 질문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한 판사는 8명으로 이들 모두 “인종 통합은 칭송받을 만한 목표”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찬반 입장 표명은 4 대 4로 팽팽했다. 예상대로 로버츠 대법원장과 얼리토, 앤서니 케네디, 앤토닌 스칼리아 등 보수 성향의 판사 4명은 반대 입장을 보인 반면 존 폴 스티븐스, 데이비드 소우터,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스티븐 브레이어 등 진보 성향의 판사 4명은 기존 정책 고수 입장을 폈다.

그러나 이날 변호사들에게 유일하게 질문하지 않은 흑인 판사 클래런스 토머스가 그동안 차별철폐조치를 줄곧 반대해온 점을 감안하면 대법원 판사 9명 가운데 5명을 통합배정 정책 반대 판사로 분류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찬반 동수일 때 결정권을 행사하는 ‘캐스팅 보트’를 쥔 것으로 평가돼온 케네디 판사가 첫날부터 반대입장을 강력히 표명한 점은 철폐 가능성 쪽에 무게를 실어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온건 보수파로 분류되는 케네디 판사는 루이빌 및 시애틀 교육구청의 변호사에게 “피부색으로 학생 개개인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학교 배정시 인종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더라도 “인종은 마지막 방편”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평등보호조항의 목적은 사람들을 피부색에 기초한 게 아니라 개인이라는 점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누구든 50여 년 전 브라운처럼 원하는 학교에 가고 싶지만 평등보호조항에 위반되는 인종에 근거한 배정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 대법관은 “어느 날 헌법적으로 필요해 만든 것을 다음날 바꿀 수는 없다”면서 지지 입장을 분명히했다. 브레이어 판사는 “점점 학교 분리 쪽으로 방향을 트는 교육구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대법원의 판결은 내년 상반기 안에 나올 것으로 미국 언론은 전망하고 있다. 미 대법원이 백인 학부모들의 손을 들어줄지, 이전처럼 학교 통합배정 정책 지지 입장을 보일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