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대표작 ‘절규(The Scream)’가 경매에 나온다.  
   세계적인 경매회사 소더비는 21일 미국 뉴욕에서 오는 5월2일 열리는 경매에 뭉크의 ‘절규’가 출품된다면서 경매가는 8000만달러(약 898억원)를 넘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뭉크의 ‘절규’는 회화 4점, 석판화 1점이 있다. 회화 4점은 뭉크 미술관이 2점을, 노르웨이 국립미술관과 개인이 1점씩 소장하고 있다. 이번에 경매에 부쳐지는 것은 노르웨이 사업가 페테르 올센이 소장하고 있는 1893년 작품으로, 유화가 아닌 파스텔화(아래 사진)다. 올센은 뭉크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토마스 올센의 아들이다.



 소더비의 뉴욕 표현주의 및 현대 미술 부분 선임 부회장인 사이먼 쇼는 “개인이 소유한 작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는 “진정으로 시대를 상징하는 작품들이 시장에 나오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생각하면 ‘절규’의 가치는 점치기 어렵다”면서 “최근 소더비 경매에 나온 걸작들이 거둔 성공을 감안하면 이 작품의 경매가는 8000만달러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장자인 올센은 경매 수익금으로 노르웨이 내 자신의 농장에 새 박물관과 미술관, 호텔을 건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뭉크의 ‘절규’는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을 묘사한 작품으로, 1892년 경험한 공황발작을 토대로 그린 작품이다. ‘절규’는 그동안 도난의 타깃이 됐다. 노르웨이 국립미술관 소장 작품은 1994년 도난됐다가 몇 개월 뒤에, 뭉크 미술관 소장 작품은 2004년에 도난됐다가 2년 뒤 각각 되찾았다.  조찬제 기자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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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빈 라덴 살해 이후 미국과 갈등의 핵으로 떠오른 ISI

파키스탄 정보당국은 2003년과 2004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북쪽으로 50여㎞ 떨어진 아보타바드에서 알카에다 연락책으로 의심받는 사람을 추적했다. 그가 수개월 전 체포된 9·11테러 주모자인 칼레드 셰이크 모하메드의 후임인 아부 파라즈 알 리비의 소재를 알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정보부(ISI) 요원들은 아보타바드의 주택 한 곳을 습격했지만 알 리비를 잡는 데 실패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전 파키스탄 대통령은 2006년 발간한 회고록 <사선에서>에 그 연락책은 알 리비가 아보타바드에 있는 3곳의 집에서 지냈다고 밝혔다고 썼다. 파키스탄 정보당국 관계자는 3곳의 집 가운데 한 곳이 지난달 2일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외교부는 빈 라덴 사망 이후 이 같은 사례를 파키스탄이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했다고 로이터통신이 지난달 5일 전했다. 하지만 로이터는 이런 주장이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미 국방부가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빈 라덴이 은신처로 사용한 집은 2004년에는 없었으며, 당시 파키스탄의 급습작전도 없었기 때문이다.

빈 라덴 살해사건 이후 고조되고 있는 미국과 파키스탄 간 갈등의 중심에는 파키스탄 정보기관 ISI이 있다.

            
 
미국은 빈 라덴 제거작전을 펼치면서 정보가 새나갈까봐 파키스탄에 알리지 않았으며, 파키스탄은 이를 비난했다. 갈등은 미 중앙정보국(CIA)이 파키스탄 내에서 수행하고 있는 무인비행기 공격을 둘러싼 논란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최대 동맹국인 파키스탄에 대한 미국의 불신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파키스탄 ISI는 9·11 테러 이후 탈레반과 알카에다 비호조직으로 비난받아왔다. 이뿐만 아니라 2008년 11월 인도 뭄바이 테러, 2005년 7월 영국 런던 지하철 테러 등의 배후로 지목돼왔다. ISI를 CIA의 파트너로 여겨온 미국도 ISI와 알카에다 및 탈레반의 유착을 의심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마이크 멀런 미 합참의장은 지난 4월 파키스탄을 방문해 ISI가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에 테러를 감행해온 탈레반 일파인 하카니 그룹과의 연계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아슈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은 “미국에 의한 부정적인 선전”이라고 맞받아쳤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2009년 5월 CBS 시사대담프로 <60분>에 출연해 ISI의 ‘이중플레이’ 가능성을 언급했다. 미국은 또 ISI가 이란과 리비아, 북한에 핵기술을 비밀리에 제공한 의혹을 받고 있는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칸 박사를 비호해온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지난 4월 말엔 미국이 ISI를 하마스나 헤즈볼라와 같은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국무부 외교문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파키스탄 국민은 진실을 알고 싶다” 파키스탄 여성 활동가들이 지난달 13일 아메드 슈자 파샤 파키스탄 정보부장과 아슈파크 파르베즈 카야니 육군참모총장이 수도 이슬라마바드 의회에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 사살작전과 관련한 브리핑을 하는 동안 ‘파키스탄 국민은 진실을 알 필요가 있다’ 등의 내용을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슬라마바드 | AFP연합뉴스



그렇다면 ISI는 테러리즘의 비호세력인가. ISI가 9·11 테러 이전까지 아프간 탈레반을 지지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파키스탄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을 인정한 세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ISI가 아프간에 개입하게 된 계기는 1979년 옛 소련의 아프간 침공사건이다.

ISI는 CIA와 함께 소련 적군에 대항해 싸운 무자헤딘 전사들을 훈련시키고 무기와 정보, 자금을 제공했다. 89년 소련 철군 이후엔 소련이 세운 괴뢰정권에 대항한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그후 설립된 탈레반 정권을 지지했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으로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서방은 ISI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은 ISI가 무장세력을 훈련시켜 아프간으로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도 파키스탄의 중서부 도시 퀘타가 탈레반의 본거지라고 주장했다.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대통령은 이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비난했지만 전문가들은 과거보다는 줄었지만 탈레반에 대한 ISI의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를 비롯한 많은 정부 인사들은 ISI를 ‘국가 속의 국가’로 불렀다. 정부의 통제 밖에서 일하고 독자적인 대외업무를 수행하고 있어서다. ISI가 독립된 권력집단이긴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와 군부의 묵인이 없다면 불가능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정서다.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하산 압바스에 따르면 ISI는 헌법적으로는 총리 소속이지만 요원 대부분은 군 소속이다. ISI는 무샤라프 군사정권 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대통령의 문민정부 이후 권한이 약화될 것으로 전망됐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자르다리 대통령은 2008년 7월 ISI를 내무부 소속으로 바꾸려 했으나 몇 시간 만에 취소했다. 카야니 육군참모총장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남아시아 전문가 브루스 리델 연구원은 파키스탄 민간정부는 군과 ISI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카야니 총장의 후임으로 ISI 부장이 된 아메드 슈자 파샤 중장은 카야니의 심복이다.

166명 희생된 뭄바이 테러 인도 경제 중심지 뭄바이의 명소인 타지마할 호텔이 2008년 11월27일 테러범의 공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여 있다. 뭄바이 | AP연합뉴스


ISI가 탈레반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숙적’ 인도와의 관계를 고려해서다. 카슈미르 분쟁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사이가 좋은 않은 상태다. AP통신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ISI가 미군 철군 이후를 대비해 아프간 탈레반 등과의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ISI가 ‘불량조직’이라는 시각이 만만찮지만 테러조직을 비호해온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ISI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많은 알카에다 조직원을 체포했다. 여기에는 9·11 테러의 주모자로 알려진 모하메드 같은 거물도 포함돼 있다. 모하메드는 2003년 라왈핀디에서 체포돼 현재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돼 있다. 파키스탄은 또 9·11 테러 직후엔 아프간 국경 부근 와지리스탄주에 군병력 8000명을 배치했고, 대테러전의 와중에 수백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하지만 파키스탄 내에서 탈레반 활동이 여전히 활발하다는 점 때문에 파키스탄군과 ISI는 이들의 활동을 비호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ISI와 CIA의 향후 관계에 대한 전망도 밝지만은 않다. 리언 파네타 CIA 국장의 후임자로 내정된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아프간 주둔 미군 사령관은 카야니 참모총장, 파샤 ISI 부장과 관계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리델 연구원은 로이터에 이 같은 상호불신 탓에 “매우 긴장되고 힘든 관계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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뭄바이 테러 배후로 재판 중
 


ISI 연루 의호가 사건은?-인도와 영토분쟁 카슈미르선 ISI가 무장단체 지원 의혹도

파키스탄 정보부(ISI)가 연루 의혹을 받는 대표적인 사건은 2008년 11월 발생한 인도 뭄바이 테러다. 뭄바이 중심부 호텔과 기차역 등을 대상으로 한 폭탄테러로 166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다쳤다. 인도 외무부는 ISI를 테러 배후로 지목했다. 공격을 감행한 무장단체 ‘라시카르 에 타이바’와 연계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라시카르 에 타이바는 인도-파키스탄 간 영토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슬람 무장단체다. 파키스탄은 이 주장을 부인했지만 이듬해 2월 테러공격이 파키스탄에서 계획됐다는 점은 인정했다. ISI는 카슈미르 지역의 이슬람 무장단체를 암암리에 지원해왔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아메드 슈자 파샤 ISI 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은 이 사건으로 미국인 희생자들로부터 기소됐다.

지난해 미국에서 체포된 라시카르 에 타이바 요원인 파키스탄계 미국인 데이비드 헤들리는 뭄바이 테러 계획에 ISI가 관여했으며, 자신에게 2만5000달러를 줬다고 진술했다. 이 사실은 최근 인도 정부 보고서를 통해 밝혀졌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파키스탄 정부는 이 사건과 관련해 미국에 강력 대응하겠다고 밝혔고, 파키스탄 언론이 이슬라마바드 주재 미 CIA 국장의 이름을 공개해 그가 미국으로 귀국하면서 양국 간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인도 정부는 또 사망자 209명, 부상자 700여명이 발생한 2006월 7월 뭄바이 통근열차 테러사건에 대해 ISI가 계획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도-파키스탄 간 오랜 갈등관계 탓에 과장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는 56명이 사망하고 약 700명이 부상한 2005년 7월7일 영국 런던 지하철역 테러사건의 배후로 ISI를 지목했다. 영국에서 성장한 자생적 테러범 4명 가운데 3명이 파키스탄계라는 이유에서다.

파키스탄 언론인 납치·사망사건의 배후에도 ISI가 등장한다. 지난달 31일 파키스탄 저명 언론인 시에드 살림 샤자드가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실종 이틀 만이었다. 아시아타임스온라인 및 이탈리아 AKI통신 파키스탄 지국장인 샤자드는 지난달 22일 알카에다의 카라치 해군기지 공격과 관련해 해군 내부 인사와의 공모 가능성을 제기해왔다. 휴먼라이츠워치의 알리 아얀 하산은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인터넷판에 “살해수법으로 봐 파키스탄 ISI가 관련된 사건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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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중동 민주화’ 선택적 개입 논란


튀니지에서 불기 시작한 아랍혁명의 바람이 리비아, 시리아, 예멘, 바레인 등지에서 역풍을 맞고 있다. 특히 미국은 리비아와 달리 반정부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으로 일관하고 있는 시리아와 예멘, 바레인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별다른 개입 움직임은 보이지 않아 ‘선택적 개입’ 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태다. 이 때문에 세 나라 정권은 이를 정권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로 받아들여 국민들의 개혁 요구를 묵살하는 반면 반정부 시위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미국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리비아 군사개입이 민주주의와 국익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려는 미국 대외정책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시리아, 예멘, 바레인 정권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니컬러스 번스 전 미 국무부 차관(하버드대 교수)은 지난달 24일 AP통신에 “우리가 항상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없다”면서 “미국은 이들 나라에 커다란 국가안보 이익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 세 나라에 어떤 국가안보 이익이 있는 것일까.

시리아 현 정권은 평화협상 ‘채널’
 

◇ 중동평화 구도의 핵심 시리아 = 지난달 18일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46)은 2000년 집권 후 최대 위기에 빠졌다. 시리아 사태는 비단 알 알사드의 위기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란과 함께 반미, 반이스라엘의 선봉이라는 시리아의 중동 내 지위를 감안하면 그 의미는 훨씬 크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 패트릭 실은 지난달 외교전문지 폴린폴리시에 기고한 ‘시리아 시한폭탄’이라는 글에서 “중동 전체에 불안을 야기할 국가가 있다면 리비아가 아닌 시리아”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에 대해 시리아 사태에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시리아가 중동의 시한폭탄이 될지는 불확실하지만 알 아사드가 국민의 개혁 요구를 거부한 채 강경진압을 고집할 경우 대규모 유혈사태는 물론 최악의 경우, 시아-수니파 간의 종파갈등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시리아의 위기는 중동 역학 관계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시리아는 이란의 가장 가까운 전략적 우방이자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에 무기를 제공하는 배후세력이다. 이런 지위 때문에 시리아의 위기는 곧 ‘이란-시리아-헤즈볼라-하마스 축’의 약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를 바라보는 미국의 심경은 복잡하다. 지난달 27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알 아사드 대통령에 대해 한 발언은 미국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클린턴 장관은 CBS방송의 일요 대담 프로그램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해 “최근 몇 달 사이 시리아를 방문한 많은 의원들은 알 아사드가 개혁주의자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정권 붕괴보다 안정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바레인 개입 땐 종파분쟁 우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시리아의 현상유지가 오히려 중동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시리아는 이란과의 긴밀한 유대나 헤즈볼라와 하마스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잠재적인 평화협상 파트너로 간주돼 왔다.

◇ 미 제5함대 사령부가 있는 바레인 = 지난 2월부터 국민의 다수인 이슬람 시아파의 반정부 시위로 몸살을 겪고 있는 수니파 왕정국가 바레인에 대해 미 백악관은 “우리는 바레인 정부가 반정부 세력과 대화하기를 촉구한다”(3월13일 성명)고 밝혔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 바레인 국왕은 그 후 반정부 시위를 ‘외국의 음모’라고 비난하고 그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면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지 않고 있다.

소국인 바레인이 믿는 구석은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에서 기인한다. 바레인에는 걸프지역과 홍해, 인도양을 아우르는 미 해군 제5함대의 사령부가 있다. 수니파의 중심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를 바로 옆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든든한 버팀목이다. 사우디는 지난달 중순 1990년대 중반 이후 처음으로 군병력을 바레인에 파견, 끈끈한 유대를 과시했다. 반정부 시위가 자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동시에 시아파가 바레인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이란과 이라크 등 시아파 국가들은 바레인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을 비난하면서 수니파 국가들의 군사 개입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지난 2일 반정부 시위 사태 진압을 위해 병력을 지원한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을 겨냥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합의가 없는 한 다른 나라의 내부 분쟁에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자칫 수니-시아파 간 종파분쟁이 빚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예멘정권 붕괴는 실질적 위협”
 

◇ 알 카에다 척결 파트너 예멘 정권 = 지난 1월 말 이후 시작된 반정부 시위로 정권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은 지난 3일 야권이 반정부 시위 이후 처음으로 제시한 권력이양안을 사실상 거부했다. 살레는 지지자들과의 모임에서 “권력이양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지만, 평화롭게 헌법적 틀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면서 즉각 퇴진 등 야권의 제안을 거부했다.

32년간 철권통치를 해온 살레가 퇴진과 정권유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는 것이 야권의 주장이다. 실제 오바마 행정부는 지난달 18일 예멘 사태와 관련해 성명을 발표했지만 살레 정권의 시위대에 대한 폭력행위를 비난하고 평화적인 시위를 보장하라는 입장을 드러내는 데 그쳤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지난달 하순 “살레 정권의 붕괴는 미국에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언급했다. 예멘 야권 대변인인 모하메드 알 사브리는 “이는 살레 편을 드는 미 행정부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으로 살레가 미국인들을 겁주기 위해 알 카에다 분자들에게 남부에서 혼란을 만들 수 있도록 청신호를 보내줬다”고 비난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미국에 살레는 예멘의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와의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될 파트너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 때문에 살레 정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AQAP는 이를 비웃듯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AQAP의 지도자 안와르 알 올라키는 지난달 31일 알 카에다 온라인 매거진에 올린 글을 통해 “아랍에 들어설 새 정부는 기존 정부보다 취약해 알 카에다에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R2P’ 개념 도입 논란>

 미국은 리비아 군사개입의 명분으로 ‘국민보호의무(Responsibility to Protect·R2P)’라는 새 개념을 내세웠다. 2005년 유엔 정상회의에서 정립된 이 개념은 민간인 학살 방지를 위한 인도적 차원에서 군사개입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R2P 개념은 미국이 그동안 적용해온 군사개입 원칙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난 1일 ‘더 뉴 리퍼블릭’ 인터넷판에 따르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개입 원칙은 ‘제한전’이었다.

1980년 이후 미국의 군사개입 원칙은 ‘와인버거·파월 독트린’으로 대표된다. 명분이 확실하고, 중대한 국익이 걸려 있으며, 국민이 지지하고, 퇴로가 확실하며, 승리가 보장된 전투에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최단기간에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국방장관 캐스퍼 와인버거와 조지 H W 부시 행정부 당시 합참의장을 지낸 콜린 파월이 주도했다. 91년 걸프전에서 이 원칙은 위력을 발휘했다.

와인버거·파월 독트린은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부시·럼스펠드 독트린으로 바뀌었다. 이 원칙은 아프가니스탄전과 이라크전을 이끈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착안한 것으로 경량화, 기동화, 유연화, 신속화를 골자로 한다.


R2P가 리비아 사례를 계기로 미국의 새로운 군사개입 원칙으로 자리잡게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도덕적인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리비아 군사개입 이후 첫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은 억압이 있는 곳마다 군사력을 활용할 수 없다. 비용과 개입의 위험을 감안하면 우리는 행동에 대한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며 진화에 나섰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스티븐 그로브슨은 지난달 31일 재단 웹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R2P를 군사개입의 정당성 근거로 삼은 것은 실수”라면서 “향후 미국의 행동을 제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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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가 없다면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친구 하나 없는 국가로 남게 될 것이다.”(1월28일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30년 이상 평화를 지켜왔고 앞으로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1월30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이집트 사태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위기감을 반영하는 말들이다.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집트 사태에 가장 노심초사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1981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83)은 지난 30년간 적대적인 아랍국가로 둘러싸인 중동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무바라크가 이번 사태로 9월 대통령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영향력을 잃게 됨에 따라 이집트 민주화 시위는 이스라엘에 ‘발등의 불’이 됐다.


“친이스라엘 대통령 물러나라” 이집트 국민들이 지난 4일 수도 카이로 중심부 타흐리르 광장에서 열린 반정부시위 도중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얼굴 위에 유대인과 유대교를 상징하는 ‘다윗의 별’을 그려놓은 포스터를 흔들고 있다. 무바라크가 친이스라엘 정책을 펴온 데 대한 이집트 국민들의 반발 심리를 보여준다. 카이로 | AP연합뉴스

무바라크의 퇴진과 민주화가 이집트의 현안이라면 현상 유지야말로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바라는 현상 유지의 핵심은 79년 3월 체결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체제의 유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은 이집트에 과격 이슬람 또는 반 이스라엘 정권이 들어선 뒤 평화협정을 파기하는 것이다. 평화협정은 미국의 지원과 함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탱해준 안전판이었다. 협정의 파기는 48년 5월 독립선언 이후 4차례의 전쟁을 치르며 형성해온 ‘불안한 평화’가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하며, 이스라엘로서는 79년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환경은 지금도 비우호적이다. 북쪽 레바논에는 적대적인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있다. 그 뒤엔 지난해 5월 가자 구호선 공격사건으로 관계가 소원해진 터키가 있다. 동쪽엔 하마스의 팔레스타인이 버티고 있다. 시리아와 이란이 그 뒤를 떠받치고 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파기될 경우 그동안 안전지대였던 남서쪽에서 이집트와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팔레스타인과의 최대 현안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지구에 대해 이집트가 적극적으로 나올 경우 이스라엘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의 중동전문가 로저 하디는 BBC 웹사이트 기고문에서 “이집트 사태는 약화된 중동평화 과정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면서 “이집트의 정권 변화는 이스라엘 지도자에겐 경종이 되고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더 포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독립 이후 아랍국가의 맹주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79년 평화협정을 기준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전쟁의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평화, 엄밀히 말하면 ‘긴장 속의 평화(cold peace)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 그 전반부를 책임진 인물은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한 가말 압델 나세르였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3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나세르의 후임인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지만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의 길을 열었다. 그 결과는 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나타났다.
역사적인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기초해 79년 3월26일 미국 백악관에서 체결됐다. 주인공은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네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었다. 이로써 이집트는 아랍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국가가 됐다. 이집트는 반대급부로 이스라엘로부터 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고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달러의 원조를 받게 됐지만 다른 아랍국가로부터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평화협정의 당사자인 사다트는 81년 10월6일 암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사다트의 장례식엔 미국의 전직 대통령 3명을 비롯해 서방에서 많은 조문단이 참석했지만 아랍국가 지도자는 어느 누구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후원국이었던 소련은 조문단조차 보내지 않는 등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반면 이스라엘은 평화협정을 통해 아랍 최대 국가와 손을 맞잡으면서 아랍지역에서 확실한 거점을 마련했다. 무엇보다도 서쪽 국경에 대해 30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또 오랜 이스라엘-아랍권의 갈등을 통제 가능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로 축소시키는 전략적인 성과도 거뒀다.
국방예산 면에서도 이스라엘은 큰 특혜를 누렸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각국 군비자료에 따르면 평화협정 이전 이스라엘 국방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국방예산은 이집트가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음에 따라 GDP의 7%(2008년)로 크게 줄어들었다.
 


사다트의 뒤를 이은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전임자의 노선을 이어갔다. 하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무바라크는 사다트가 아랍국가 대통령으로서 이스라엘을 처음 방문해 의회(크네셋)에서 연설한 것과 달리 집권 30년 동안 8명의 이스라엘 총리를 상대했지만 단 한차례만 이스라엘을 찾았다. 95년 11월 이스라엘 급진파에 피살된 이츠하크 라빈 당시 총리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서다. 반면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 5개월 동안 두 차례 찾는 등 이스라엘 측의 이집트 방문은 빈번했다. 그럼에도 무바라크는 82년 레바논 전쟁, 87년과 2000년 팔레스타인의 무장봉기(인디파다), 2008년 말 가자 침공 때도 평화협정을 준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에 대항해 투쟁해온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마무드 압바스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를 지지하는 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과정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었다. 2006년 하마스가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하자 무바라크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최대 야권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이 ‘하마스 효과’에 자극을 받을 것을 우려해서다. 2007년 6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에 발맞춰 라파 국경검문소를 폐쇄, 가자지구의 150만 팔레스타인인을 경제적 고통 속에 빠뜨렸다. 이스라엘의 봉쇄조치 속에서 가자 주민들의 생명선 역할을 해온 국경터널을 폐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바라크는 이스라엘이 필요한 천연가스의 약 40%를 공급해주고 있다.

 
이집트 사태로 무바라크는 기로에 서게 됐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향후 이집트 상황에 대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지만 이스라엘로서는 관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무바라크의 대선 불출마 선언에 따라 ‘무바라크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이집트와의 관계에서 독립변수였던 이스라엘이 종속변수가 됐으며, 이집트 사태가 어떻게 귀결되더라도 이스라엘로서는 무바라크 정권 시절의 특혜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의 운명은 어떤 세력이 이집트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평화협정의 존폐 여부를 진단하는 전문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이스라엘 군사전문가인 아모스 하렐은 영국 일간 가디언에 “이집트 정권 붕괴는 이스라엘에 엄청나게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이라면서 “결국 이스라엘에 미국의 지원에 이어 가장 큰 전략적 자산인 이집트와 맺은 협정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미셸 듄 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에서 “비폭력적인 정권 이행이 이뤄진다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은 존중될 것으로 본다”면서 “이집트 국민들은 전쟁상태로 되돌아가길 원치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집트 사태가 이스라엘 내 강경파를 자극하는 동시에 이집트 내부에서 가자지구에 대한 정책변화를 요구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스라엘 퇴역장군들이 만든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연구소의 오데드 에란은 “국방 관련 기관들이 더 많은 예산을 요구할 것이 틀림없다”고 시사주간 타임 인터넷판 기고문에서 전망했다. 미셸 듄은 “이집트의 새 정부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좀 더 친밀하게 대할 것”이라면서도 “시나이 반도 지역으로의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문제와 폭력행위 준동 가능성 탓에 가자 주민들에게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으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함께 미국의 중동정책의 양대 축이긴 하지만 미국의 중동 최대의 우방국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미국 바드대학의 월터 러셀 미드는 폴리티코에 기고한 글에서 “이집트에 과격 정부가 들어서서 평화협정을 무효화하거나 하마스의 폭력행위와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경우 미국은 이스라엘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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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소녀가 9일 가자지구와 이집트 국경에 있는 라파 검문소에서 이집트로 가기 위해 마냥 기다리고 있다. 가자지구/AP연합뉴스


   이스라엘은 2007년 6월부터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 조치를 취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에서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물품에 대해 선별하거나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당국은 그동안 그 이유에 대해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는 무장정파 하마스 손에 무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는 핑계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보는 핑계고 본심은 하마스에 대한 경제전쟁 차원인 것으로 밝혀졌다. 쉽게 말하면 가자지구에 대한 경제 봉쇄를 통해 하마스를 목숨줄을 죄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 일간 매크래치 인터넷판(http://www.mcclatchydc.com/2010/06/09/95621/israeli-document-gaza-blockade.html)은 9일 보도에서 드러났다. 신문은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권익옹호단체 ‘기샤(자유운동을 위한 법률센터)’로부터 입수한 자료를 인용해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 봉쇄를 하마스에 대한 경제 전쟁을 위한 권력 행사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기샤는 앞서 이스라엘 정부를 상대로 가자지구 봉쇄에 관한 정보공개청구소송을 냈으며, 올해 초 승소해 관련 자료를 받아냈다. 이스라엘 정부는 기샤 소송에 대한 답변서에서 “어떤 나라든 갈등을 겪고 있거나 경제 전쟁을 원하는 집단에 경제협력을 하지 않거나 경제지원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봉쇄 목적을 하마스에 유입되는 무기 차단을 위해서라고 한 이스라엘의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난 셈이다. 기샤의 책임자 사리 바시는 “정부 답변서는 이스라엘의 가자 봉쇄조치는 무기 반입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지지구 내 팔레스탄인에 대한 집단 처벌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샤와 유엔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2006년 1월 가자지구 총선에서 압승하자 가자지구 내 반입 허용 물량을 급격히 줄였다. 하마스 집권 전까지 가자지구에 반입되는 생필품은 한 달 평균 트럭 1만400대 분량이었다. 1년여 뒤 2007년 6월 봉쇄 실시 이후 반입량은 4분의 1 수준인 트럭 2500대 분량으로 줄었다. 반입 품목도 봉쇄 이전 4000개에서 봉쇄 이후 100분의 1 수준인 40개로 급감했다. 시멘트와 철근은 벙커나 다른 군사시설로 전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반입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난달 31일 가자 구호선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으로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자 이날 가자지구내 반입 품목을 확대하는 조치를 취했다. 탄산음료, 주스, 잼, 향신료, 면도용 크림, 포테이토칩, 쿠키, 사탕의 반입을 허용한 것이다.
 한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마무드 압바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의 방문에 발맞춰 팔레스타인에 대한 4억달러 추가 원조안을 발표했다. 이날 백악관에서 압바스 수반을 만난 오바마 대통령은 “가자 상황은 지속불가능하다”면서 무기를 제외한 생필품과 경제발전에 필요한 물품의 반입 허용을 이스라엘 정부에 요구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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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961년 8월4일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네시아 출신이고 어머니는 미국 출신 백인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미국 사회에서 백인과 흑인간에 결혼하는 비율은 1000쌍당 1쌍꼴이었다. 그 비율은 그 이후 점점 증가해 1980년엔 150쌍당 1쌍꼴로, 2008년엔 60쌍당 1쌍꼴로 급증했다.
  이는 미국 사회에서 타 인종간 결혼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4일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 조사(http://pewresearch.org/pubs/1616/american-marriage-interracial-interethnic)에 따르면 2008년에 결혼한 380만쌍 가운데 14.6%가 서로 다른 인종간 결혼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해 결혼한 커플 가운데 7쌍당 1쌍이 타 인종과 결혼한 것이다. 이는 1960년에 비해 6배, 1980년(6.7%)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
 타 인종과의 결혼 비율은 아시아계가 31%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히스패닉(26%), 흑인(16%), 백인(9%) 등 순이었다.
 타 인종간 결혼 비율은 인종 간에도 성별 차이를 보였다. 흑인의 경우 남성(22%)이 여성(9%)보다 많았다. 아시아계도 남성 40%, 여성 20%로 비슷했다. 반면 백인이나 히스패닉에서는 남녀 차이가 크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별 차이도 두드러져 히스패닉 및 아시아계 이민자가 많은 서부가 21%로 남부와 북동부(13%), 중서부(11%)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퓨리서치 측은 오랫동안 금기시돼온 타 인종간 결혼에 대한 관념이 누그러뜨러지고 아시아 및 라틴아메리카 출신 이민자가 급증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했다.
   이번 조사는 2008년 미 인구조사국의 미국사회조사(ACS) 자료와 퓨리서치의 자체 전화조사(2884명)를 토대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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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inkhole covers a street intersection in downtown Guatemala City on Wednesday.  Moises Castillo/AP



  지금 밟고 있는 땅이 폭우로 인해 갑자기 폭삭 꺼진다면 어떨까. 그것도 지름 20미터, 깊이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구멍이라면 말이다. 거짓말 같은 일이 중미 과테말라에서 지난달 29일에 일어났다.
  3일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 등에 따르면 이 지역 올해 첫 열대성 폭풍인 ‘애거사’가 지나간 후 수도 과테말라 시티 시내에 미스터리 구멍(sinkhole)이 생겼다. 현장 사진은 조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둥글고 깊다. 그 위에 있던 3층짜리 의류공장은 지하 구덩이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인 점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뒤에 발생해 피해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 같은 일이 과테말라에서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3년 전 2007년에도 이 곳에서 15블록 떨어진 곳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 깊이 100미터 거대한 구멍은 3명의 인명과 가옥 수 채를 삼켰다.
 거대한 구멍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원인 규명에 나선 과학자들은 일단 지진에 따른 단층에 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과테말라 당국은 낡은 하수도가 지반을 침식해 생긴 것으로 보고 있다. 알바로 아르주 과테말라 시티 시장은 “36년된 낡은 하수도와 관련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현지 신문 21세기가 전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땅이 꺼져 생긴 구멍은 물에 약한 석회암 지반에서 종종 일어나는 현상이다. 석회암이 용해되면서 거대한 구멍이 생기며, 땅을 지탱할 만한 것이 없으면 붕괴돼 큰 구멍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USGS의 지하수 전문 수문학자 마크 카스마렉은 이 구멍이 오랜 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지하 구멍을 덮고 있는 지표면이 시간이 지나 위태로운 상태가 되면 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3년전에 생긴 거대한 구멍은 현재 메워져 안전하다고 과테말라 당국은 밝혔다.

*더 많은 관련사진을 보려면 다음 사이트를 클릭하세요.사진출처는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 6월3일자
 http://www.csmonitor.com/CSM-Photo-Galleries/In-Pictures/Guatemala-sinkh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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