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떠오른 때가 2004년이다. 당시 마흔세 살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오바마는 그해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자로 섰다. “진보 미국도, 보수 미국도 없다. 미합중국만 있다”는 그의 명연설은 민주당 지지자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을 감동시켰다. ‘통합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오바마는 그 여세를 몰아 그해 중간선거에서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4년 뒤 백악관에 입성했다. 오바마의 과거를 새삼 꺼낸 것은 오는 11월 대선에서 재선을 노리는 그가 미국 사회 갈등의 주범으로 떠올랐다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경향신문DB)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는 지난 4일 ‘2012년 미국인의 가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의 역할과 개인의 종교취향, 정치참여에 이르기까지 15개 부문에 걸쳐 미국인의 생각을 분석한 것이다. 1987년 시작한 이 조사는 25년 동안 미국인들의 가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눈에 띄는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난 25년 동안 미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됐는 점이다. 이는 민주·공화당 지지자 간 정치적 이념차가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민주당 지지자는 좀 더 왼쪽으로, 공화당 지지자는 좀 더 오른쪽으로 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미국 사회가 갈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정치적 양극화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정치적 양극화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으며, 그동안 알려진 인종·계급·성보다 더 큰 사회 갈등요소라는 점을 확인한 일이 이번 조사의 함의일 터다. 두번째는 정치적 양극화가 오바마 행정부에서 더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25년 전 민주·공화당 지지자 간 정치적 가치에 대한 격차는 10%포인트였다. 25년 후 그 격차는 18%포인트로 커졌다. 1987년부터 2002년까지 15년 동안 그 격차는 3%포인트였지만 오바마가 집권한 2009년엔 6%포인트로, 올해엔 8%포인트로 벌어졌다. 그 사이에 백악관 주인은 로널드 레이건(공화), 조지 HW 부시(공화), 빌 클린턴(민주), 조지 W 부시(공화)에서 오바마(민주)로 바뀌었다. 퓨리서치센터의 지적은 오바마가 미국인의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겼다는 해석을 낳을 수 있다. 한때 통합의 아이콘에서 정치적 양극화의 주범이 됐으니 오바마에게 이보다 더한 역설은 없을 터이다. 전임자가 물려준, 대공황 이후의 최대 경제위기라는 짐을 떠안은 그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다.


 

  정치적 양극화가 오바마 행정부에서 두드러진 이유가 뭘까. 퓨리서치센터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없는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의 입장이 더 보수화된 점에서 찾았다. 정부의 역할과 관련된 두 가지 조사에서 이 부분이 명확히 드러났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데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 즉 사회안전망 필요성에 찬성한 민주당 지지자는 79%이지만 공화당 지지자는 40%에 불과했다. 이들의 격차는 25년 전 17%포인트에서 39%포인트로 두 배 이상 벌어졌다. 환경보호에 대한 입장도 현격히 달랐다. 첫 조사가 시작된 1992년엔 민주·공화당 지지자 90%가량이 엄격한 법과 규제의 필요성을 지지했다. 그러나 규제가 필요하다고 믿는 민주당 지지자는 20년 전과 똑같은 93%로 변함없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는 87%에서 47%로 급감했다. 두 당 지지자 간 격차도 6%포인트에서 46%포인트로 벌어졌다.

 

 

  어느 나라든 정권에 대한 지지는 당파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정치적 회의와 불만이 커진다. 이번 조사에서도 무당파 비율은 38%로 민주(32%), 공화(24%) 지지자보다 많았다. 75년 만에 가장 높다고 한다. <불평등 민주주의>라는 책을 통해 역대 미국 행정부의 이데올로기와 가치, 당파성이 핵심 정책 결정과 경제적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미 밴더빌트대학의 래리 바텔스 교수는 정치의 힘을 강조한 바 있다. 그것은 갈라진 민심을 추스르고 사회 통합을 이뤄내는 정치적 리더십이다. 재선 시험을 5개월 앞둔 오바마 앞에 놓인 도전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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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5월 미국 특수부대가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을 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침착했다. 밤 11시가 넘어 그 사실을 발표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TV카메라 앞에 선 그는 감정을 억눌렀다. “오늘 밤은 9·11 당시 팽배했던 단합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나흘 뒤 9·11 현장 ‘그라운드 제로’를 찾았을 땐 침묵의 헌화를 했다. 방송 인터뷰에서는 “축하 행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빈 라덴 시신 사진 공개 요구와 사망을 둘러싼 언론의 끝없는 의혹 제기에도 침묵했지만 이것이 미국의 공적 1호를 제거한 오바마의 허물이 될 수는 없었다.

 

 한데 ‘죽은’ 빈 라덴이 1년 만에 되살아났다. 그를 되살린 이는 제거 명령을 내린 오바마다. 오바마가 1년 만에 빈 라덴을 되살린 이유는 뻔하다. 재선을 노리는 오바마에게 빈 라덴 사살은 최대의 정치적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오바마 대선 캠페인 소재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한 번의 기회’라는 대선 광고에 나와 오바마가 빈 라덴 사살 명령을 내릴 때까지의 고뇌를 묘사한다. 클린턴은 “그(오바마)는 더 어렵고 명예로운 길을 택했다”면서 “미트 롬니(공화당 대선 후보)는 어떤 길을 택했을까”라고 질문한다. 이어 2007년 롬니가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로 결정타를 날린다. “한 사람을 잡기 위해 수십억달러를 써가며 백방으로 노력할 가치는 없다.” 조 바이든 부통령도 가세했다. 그는 뉴욕대 학생들에게 “빈 라덴은 죽었고 제너럴모터스는 살아났다”는 말로 오바마의 업적을 요약했다. 대미는 오바마가 장식했다. 빈 라덴 사살 1주년을 맞아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하는 깜짝쇼를 벌였다. 빈 라덴 제거 과정을 지켜본 백악관 상황실을 이례적으로 방송 인터뷰 장소로 활용했다. 그곳에서 그는 “빈 라덴 사살 작전일은 재임 중 가장 중요한 하루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군통수권자로서 느낀 고뇌를 보여주는 데 이보다 좋은 말은 없을 터이다.

  


(경향신문DB)



 대테러전 성과에 관한 한 오바마의 치적은 화려하다. 제거한 테러 지도자는 빈 라덴만이 아니다. 작전참모 아티야 아브드 알 라흐만(2011년 8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 지도자 안와르 알 올라키(2011년 9월), 파키스탄 탈레반 최고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2009년 8월)도 그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자신의 치적을 홍보하는 일은 당연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이 써온 수법이다. 그러나 오바마의 죽은 빈 라덴 활용전략에 못마땅해하는 부류들이 있다. 한쪽은 공화당이다. 롬니 후보 진영과 2008년 대선 후보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슬프다” “창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바마가 빈 라덴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활용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정치공세일 뿐이다. 다른 한쪽은 오바마가 빈 라덴을 잡은 공을 독차지하려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빈 라덴 제거 공로는 일차적으로 그 결정을 내린 오바마와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네이비실 팀6의 몫이다. 하지만 미 중앙정보국(CIA)과 군 인사, 이에 협력한 민간인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빈 라덴 제거는 협력의 결과물인데도 오바마가 자신의 치적만 강조한다는 것이 이들의 불만이다. 다시 말하면 오바마는 정치인이 아닌 대통령으로 행동해야 하며, 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의 죽은 빈 라덴 활용 전략은 효과가 있을까. 대선 레이스 전체로 보면 이는 ‘원 포인트’ 전술이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다는 얘기다. 안보 차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빈 라덴 사살이 이 지역 평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는 점이다. 많은 보수파들은 고개를 젓는다. 더욱이 오바마의 대외정책 분야 치적이 아무리 눈부시다고 해도 약점인 경제 문제를 감출 수는 없다. 전임자인 부시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논리도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터이다. 죽은 빈 라덴에 기대고 있는 살아있는 오바마의 향후 전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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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필시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의 말을 무시하듯 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그가 말을 바꿔도 마냥 믿기만 한다. 오히려 이 일에 개입해 편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압박마저 느낀다. 이란 핵개발을 둘러싼 이스라엘 얘기다. 자고 일어나면 이란 핵개발 관련 뉴스가 외신을 뒤덮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물론 공화당 대권후보들까지 한목소리로 이란을 비난한다. 이스라엘은 한술 더 뜬다. 오는 7월까지 이란 핵시설을 공격하겠다며 미국마저 협박한다.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증거도 없고, 이란 핵무기 개발 예측시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말바꾸기가 이어지는데도 왜 사람들은 귀를 쫑그릴까.


이란 핵사태 해결을 위해 만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오바마 미국 대통령(경향신문DB)


이스라엘이 이란 핵무기 개발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다. 1998년 당시 이스라엘 군정보기관 책임자 모셰 야알론은 이란이 2008년까지 핵무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98년은 이란이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한 해다. 야알론의 경고는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봉기)와 레바논 전쟁 탓에 파묻혔다. 이란 핵무기 개발 시기에 관한 이스라엘의 예측이 먹혀든 것은 2006년부터다. 당시 이스라엘 군정보기관 책임자 아모스 야들린은 그 시점을 2010년으로 예측했다. 2009년엔 정보기관 모사드 책임자이던 메이어 다간이 2014년으로 시기를 늦췄다. 2010년엔 그 시기가 다시 2012년으로 앞당겨졌다. 이스라엘의 이란 핵무기 소유 예측시기가 당겨졌다 늦춰졌다를 반복하자 이스라엘에서조차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성급한 발표를 했다는 비난이 나왔다. 이스라엘 정보 책임자들의 예측에도 이란이 핵무기를 만들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스라엘의 행태는 장난으로 거짓경고를 일삼은 양치기 소년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개발 전략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댄다. 자신의 말에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는 식이다. 


미 정보당국은 이란 핵개발이 이미 2003년에 중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인 2007년에 이를 처음으로 선언했고, 오바마 행정부도 재확인했다. 그런데도 논란이 끊임없는 데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영국 일간 가디언이 최근 흥미로운 보도를 했다. 이란 핵개발 문제가 정치화한 것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2009년 친서방 인사인 야마노 유키아로 바뀐 데서 비롯됐다는 내용이었다. 미국과 서방의 입맛에 맞게 보고서를 만들어 이란 핵개발 의혹을 과장했다는 것이다. 흥분과 감정에 밀려 냉정과 이성이 설자리를 잃으면 일어나지 않을 전쟁도 일어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그렇다. 9·11 테러로 미국 중심부를 공격당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화학무기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고 비행기를 이용해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딕 체니 부통령도 미 본토가 대량살상무기로 공격받을 가능성이 1%라도 있으면 확실하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이라크 침공 명분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1%의 가능성이 아니라 핵무기를 소유할 가능성만 있어도 전쟁으로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고 있다. 이란 핵개발을 둘러싼 위기가 이란 공격으로 이어져서는 안될 일이다. 지금은 외교적 해법이 필요한 때다.


이스라엘에는 다음과 같은 전래설화가 있다고 한다. 한 랍비가 있었다. 그는 폭군에게 자기 지역 유대인의 목숨을 살려주면 1년 안에 그의 개가 말을 하도록 가르치겠다는 엉뚱한 약속을 한다. 이 얘기를 들은 랍비 부인은 그를 바보라고 했다. 그러나 랍비는 말한다. “1년은 긴 시간이다. 폭군이 죽을 수도, 내가 죽을 수도 있지.” 랍비는 비밀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또 개가 말을 할 수도 있는 거고.” 이스라엘은 주민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폭군과 협상한 랍비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협상과 기다림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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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스타 앤젤리나 졸리의 감독 데뷔작 <피와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배경은 보스니아 전쟁(1992~95)이다. 전쟁 전 사랑에 빠진 무슬림 여성과 세르비아 남성이 전쟁 때 포로와 지휘관으로 만나는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를 그렸다. 지난 13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졸리는 시사회가 끝난 뒤 자신의 영화가 시리아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는 국제사회의 ‘웨이크업 콜’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해온 졸리에게는 보스니아 전쟁의 악몽이 시리아 참상과 겹쳐졌을 법하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정부군의 유혈진압으로 국민 5500여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홈스에서는 정부군의 무차별 포격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은 죽음과 굶주림의 공포 속에서 연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제사회는 손을 놓고 있다. 이것이 졸리가 국제사회에 던진 경고다. 졸리의 심정은 시리아 참상을 지켜보는 여느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경향신문DB

 
 
시리아 사태는 20년 전 보스니아 전쟁과 성격은 다르지만 닮은 점이 있다. 풀기 어렵다는 종교와 민족 문제가 연루된 갈등이라는 점이 그렇다. 보스니아 전쟁이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와 보스니아계(이슬람교)·크로아티아계(가톨릭) 간 갈등이라면 시리아 사태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 종파갈등 성격이 짙다. 대량학살이라는 점도 닮았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10만명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리아 사태는 보스니아 전쟁과 달리 지정학적 중요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보스니아는 유고연방의 작은 국가에 불과했다. 반면 시리아는 러시아, 이란 같은 강대국을 우방으로 둔 데다 전략적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국제사회가 군사개입을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향신문DB


 
그럼에도 보스니아 전쟁 당시 국제사회의 개입과정이 시리아 해법에 시사하는 바가 없진 않다. 유고연방이 구소련 붕괴 뒤 해체에 들어갈 때만 해도 국제사회는 불개입이 원칙이었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추진하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3인방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는 세르비아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는 인도주의적 위기에 빠졌다.
국제사회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됐다. 관련 유엔 안보리 결의안만 100개 이상 채택됐다. 첫 조치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무장해제였다. 무슬림 보호를 위한 안전지대도 설치됐다. 유엔 평화유지군도 파견됐다. 그러나 이들에겐 자위를 위한 무력 행사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1995년 7월 무슬림 8000여명이 학살되는 스레브레니차 대참사를 낳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군력을 투입하는 무력개입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켰다. 

국제사회가 보스니아 전쟁에서 배운 값비싼 교훈은 군사개입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교훈을 시리아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인도주의적 개입은 무력개입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깊어가는 시리아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마냥 지켜만 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미국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의 소네르 차이아프타이와 앤드루 태블러는 최근 ‘인도주의적 안전지대: 시리아를 위한 보스니아의 교훈’이라는 글에서 “시리아에 인도적 개입을 하려면 보스니아 전쟁의 교훈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제시하는 보스니아 전쟁의 교훈은 세 가지다. 군사시스템을 갖춘 안전지대 설치, 평화유지군에 폭넓은 무력 행사권 부여, 안전지대와 인도주의적 회랑 보호를 위한 공군력 사용이다. 

24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는 ‘시리아의 친구들’ 회의가 열린다. 아랍연맹과 유럽 국가들이 주도하는 회의에서는 홈스처럼 고립된 지역을 ‘인도주의 회랑’으로 만들고, 터키 국경에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국제사회가 보여준 인도주의적 개입과정 그대로다. 과연 국제사회는 시리아 사태 종식을 위해 보스니아 전쟁에서 배운 교훈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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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다. 미국이 핵개발 의혹 때문에 이란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는 등 경제제재를 취한 데 따른 조치다. 미국은 이란이 동원할 수 있는 무기로 기뢰, 무장 고속정, 대전함미사일 등을 꼽는다. 이 가운데 기뢰를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묘책이 있다. 바로 ‘돌고래 부대’의 투입이다. 바레인에 있는 미 제5함대 사령관을 지낸 팀 키팅 전 제독은 미 공영 NPR방송과의 최근 인터뷰에서 “돌고래는 해저 물질을 탐지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돌고래의 음파 탐지 능력은 놀랍다. 110m 떨어진 곳에 있는 크기 8㎝의 물체도 탐지한다. 눈을 가리고도 25센트와 10센트짜리 동전을 구분할 정도다. 특히 자연물과 인공물을 구별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미 해군은 돌고래의 이런 특성을 기뢰 탐지에 활용하기 위해 훈련시켰다. 돌고래가 기뢰를 찾으면 수중음향장치를 근처에 떨어뜨린다. 그러면 미 해군 잠수요원들이 기뢰를 제거하는 것이다. 미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는 기뢰 탐지용 돌고래 80마리가 있다고 한다. 지난 13일 월간 애틀랜틱 인터넷판이 전한 내용이다. 
 

이란 잠수함 함대가 오만해 근처 해역에서 기동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아이들이 사랑하는 돌고래가 기뢰 제거작전에 투입되는 것은 꺼림칙하다.
돌고래는 1960년대 초부터 기뢰 탐지 훈련을 받았다. 두 차례 실전에도 투입됐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최근 사례다. 당시 걸프만에 투입된 돌고래는 8마리였다. 돌고래들은 사담 후세인이 심어둔 기뢰와 부비트랩 100여개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전했다. 미군이 돌고래를 기뢰 탐지에 활용해온 사실은 1990년대 초가 돼서야 공개됐다. 기밀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동물보호단체의 반발을 감안했음직하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미국과 이란이 실제로 무력충돌할 경우 돌고래 처지까지는 헤아리지 못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역사가 보여준다. 두 나라는 1988년 걸프만에서 충돌했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88) 막바지 무렵이었다. 이라크가 이란 유조선을 공격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이라크 편을 든 쿠웨이트를 비롯한 걸프국가들의 유조선을 보복 공격했다. 미국은 쿠웨이트 유조선에 성조기를 꽂고 운항하는 것을 지지함으로써 이란을 자극했다. 미국과 이란은 충돌 직전 상황에 이르렀다. 이란은 걸프만에 기뢰를 설치했다. 테헤란 중심부엔 ‘페르시아만은 미국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펼침막이 내걸렸다. 마침내 미국 프리깃함이 이란이 설치한 기뢰에 부딪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이란 정유시설을 폭격했다. 이란도 전투기를 동원해 미 선박을 공격하면서 서로 간 보복전이 이어졌다.
그해 7월 최악의 사건이 터졌다. 미 순양함 빈센스호가 상공을 지나던 이란 민항기를 이란의 F14 전투기로 착각해 미사일로 격추시킨 것이다. 탑승객과 승무원 290명 전원이 사망했다. 국지전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 상황은 미국이 실수를 인정하고 거액의 보상금(6180만달러)을 지불함으로써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미국의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 (경향신문DB)



지난해 말부터 전개되는 상황은 무력충돌 위기를 높이고 있다. 이란의 미국 무인비행기 격추, 이란 해군의 호르무즈 해협 군사훈련, 이란 핵과학자 암살사건, 이란산 원유 수입 금지를 위한 미국의 국방수권법 발효, 이란의 미국 스파이단 적발 및 미국인 사형 선고….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 인근 해역에 항공모함 3척을 파견했다.
이 모든 상황은 무력충돌을 낳는 방아쇠가 될 개연성이 있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고조되는 위기가 전쟁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미 해군 측은 돌고래가 기뢰 탐지 작전을 하다 죽은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돌고래가 항상 운이 좋을 수만은 없다. 언제든 우발적으로 기뢰를 건드릴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이란이 돌고래가 기뢰를 탐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살상할 수도 있다. 전쟁 때문에 돌고래를 희생시켜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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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국제뉴스를 다루면서 2011년만큼 ‘격동의 해’라는 말을 실감해본 적이 없다. 새해 벽두부터 세밑까지 역사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워낙 큰 사건들이 많아 되돌아보는 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다. 사건을 좇는 데만 급급해 세계사적인 변화의 큰 흐름을 제대로 읽고 짚어내지 못한 것이 아닌지 회한도 든다. 그럼에도 올 한 해의 의미를 정리하자면 ‘분노와 저항의 해’라고 부르고 싶다. 거리로 나선 수많은 사람의 분노와 저항은 인간정신과 시대정신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시사주간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the protester)’를 선정한 데 공감한다. 특히 리처드 스텐절 타임 편집장이 선정 이유로 밝힌 글 가운데 “시위의 물결은 소셜네트워크보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빚어낸 혁명이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2011년 분노와 저항의 물꼬는 튀니지의 청년 노점상이 텄다. 지난해 12월17일 경찰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한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1월4일 숨졌다. 부아지지의 분신과 죽음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을 낳은 세르비아 청년의 총성과 다름없었다. 누가 이 사건이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단초가 될 줄 알았을까. 부아지지의 분신을 계기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아랍의 봄’ 시위가 시작됐다. 아랍의 봄은 서방의 지배나 이스라엘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다. 부패와 가난에 대한 반발이자 자유와 인간 존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의 표출이었다. 울림은 컸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에서는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으로, 미국에선 월가 점령 시위로 번졌다. 칠레에선 등록금 반대 투쟁으로, 이스라엘에선 생활고 불만 시위로, 모스크바에선 반푸틴 시위로 이어졌다. 이처럼 전 지구적으로 시민들이 무능한 리더십과 제도에 항의해 들고 일어난 적은 없다.

 
  아랍의 봄은 일견 성공했다. 많은 독재자가 스러졌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죽음을 맞았다.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튀니지의 벤 알리, 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랍의 겨울’이었다. 이것이 아랍의 봄이 낳은 최대 역설이다. 아랍 민중이 서방의 지원을 받아온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서방은 강경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방은 혁명 후 아랍권이 민주주의와 이슬람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선택은 아랍인들의 몫이다. 서방이 혁명 후 들어설 이슬람 정권을 적으로 여길 경우 아랍의 봄의 성과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17개국의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 유럽 지도자들은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머리를 맞댔지만 결과물은 없다. 이 때문에 유럽 지도부가 1년 동안 유로존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인들의 놀음에 놀아났다는 시민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좌절이 커지고 불황의 수렁이 깊을수록 ‘어둠의 세력’도 커지기 마련이다. 극우주의자들이 유로존 위기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는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 2011년 분노와 저항의 시위는 이미 역사를 바꾸고 있고 미래도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동시에 지금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도 보여줬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리더십이요, 새로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다. 새 시대에 대한 기대는 세계를 불확실성에 빠뜨릴 수 있다. 2012년 국제정세도 안갯속이다.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대선이 치러진다. 중국에서는 지도부 교체가 이뤄진다. 현재로서는 이들 국가에서 선거혁명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한번 방향을 잡은 물줄기는 제 갈 길을 가는 법이다. 2011년에 심은 씨앗이 2012년에 어떤 열매를 맺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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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3월21일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역사적인 행진이 시작됐다. 흑인의 투표권 쟁취를 위한 ‘셀마~몽고메리 행진’이었다. 미 전역에서 참여한 8000여명은 나흘간 약 87㎞를 걸어 25일 목적지인 몽고메리의 주의회 앞에 도착했다. 이 행진은 두 차례의 좌절 끝에 성취한 것이라 의미가 각별했다. 3월7일 첫 행진은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릴 만큼 유혈이 낭자했다. 주 경찰은 셀마의 에드먼드 페티스 다리 위에서 행진하던 약 600명의 흑인을 향해 곤봉과 채찍 세례를 퍼부었다. 이 사건은 다음날 저명한 흑인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현장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으며, 역사는 바뀌었다. 킹 목사는 3월9일 1000여명을 이끌고 몽고메리로 향했다. 이들은 다시 주 경찰에 막혔다. 그리고 ‘피의 일요일’ 18일 뒤 몽고메리의 주의회 앞에 당당히 섰다.


지난 9일 월가 점령 시위대 일부가 역사적인 발길을 내디뎠다. 뉴욕 맨해튼의 리버티 스퀘어에서 수도 워싱턴까지 386㎞를 걷는 ‘뉴욕~워싱턴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오는 22일 워싱턴의 맥퍼슨 스퀘어에 도착할 때까지 행진을 통해 월가 금융인의 탐욕을 고발하고 새 체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행진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셀마~몽고메리 행진과 비교하는 것조차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불의와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진을 실시간으로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하고 있다. 지난 15일 새벽엔 월가 점령 시위의 진앙인 주코티 공원이 경찰에 유린되는 모습을 필라델피아에서 인터넷을 통해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희망을 꺾으려는 공권력에 분노하며 다짐했다. “경찰의 행위가 역사상 가장 큰 실수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로이터 연합뉴스 | 경향신문DB

 킹 목사도 흑인들이 처한 상황과 진실을 향한 집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흑인들에게 끊임없이 희망의 불을 지폈다. 그 결과 흑인민권운동은 결실을 맺었다. 셀마~몽고메리 행진을 마친 킹 목사는 앨라배마 주의회 의사당 계단에서 또 하나의 명연설을 했다. ‘우리는 계속 행진할 것이다.’ 킹 목사는 “그 어떤 것도 집념에 찬 사람들이 행진하면서 내디디는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진실은 계속 행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진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행진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폭력을 강조했다. “우리의 목표는 결코 백인들을 이기거나 굴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우정과 이해를 얻어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그 자체로서 평화로운 사회, 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는 날은 백인의 날도 아니요, 흑인의 날도 아닐 것입니다. 그날은 인간다운 날이 될 것입니다.”

월가 점령 시위가 시작 두 달 만에 고비를 맞고 있다. 뉴욕 주코티 공원을 비롯한 미 곳곳의 점령지가 해산을 당했다.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 취리히의 동조 시위대 점령지도 강제 철거됐으며, 영국 런던 시위대 점령지도 철거 위협 속에 놓여 있다. 공공안전과 위생 등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1%의 본격적인 반격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월가 점령 시위대가 내세운 ‘1% 대 99%의 싸움’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현 체제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이는 1%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역사적인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1950~60년대 킹 목사가 그랬듯 온갖 억압과 박해도 비폭력 투쟁과 진실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 당시 주역인 히피들은 다수로부터 조롱당했지만 그들이 간 길이 옳은 방향이었음을 말이다. 월가 점령 시위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신념과 희망을 꺾지 않는 의지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만이 끝내 승리할 수 있다. 해서, 지금은 희망을 점령할 때다.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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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반월가 시위’는 노동과 정당한 부의 축적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됐다. 2008년 금융위기의 장본인인 월가 금융인의 탐욕과 부도덕성은 일반 미국인들을 두 번이나 울렸다. 많은 미국인은 금융위기로 초래된 경기침체로 일자리도, 살 곳도 잃었다. 굶주리느냐 마느냐 생존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도 많다. 반면 정부의 구제금융 덕에 살아남은 월가 금융인들은 보너스 잔치를 벌이고 자기 배만 채운다. 그러면서 시위대의 주장에 정당한 부의 축적이라고 반박한다. 정당한 부의 축적은 미국을 지탱해온 자본주의 정신의 원천이라는 이유에서다. 많은 미국 부자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 


반월가 시위가 초래한 정당한 부의 축적에 관한 논쟁은 두 사람을 떠올린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통해 자본주의 노동윤리의 형성과정을 파헤친 막스 베버와 베버가 책에서 자본주의 정신을 실현한 이상형으로 제시한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베버는 노동에 대한 강박관념을 낳은 자본주의 정신이 노동을 통해 신의 구원을 확인받으려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정신은 합리적인 이윤추구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돈 버는 것 자체를 정당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프랭클린은 개척정신과 실용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프랭클린이 자서전에서 밝힌 절제와 근면 등 13가지 생활덕목은 자기계발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많은 미국인은 그가 제시한 덕목을 따라 성공을 이뤘고, 미국은 위대한 국가가 됐다. 말하자면 프랭클린은 미국 성공신화의 개척자인 셈이다. 미국 최고가 지폐인 100달러 초상화의 주인공이 프랭클린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랭클린의 잣대로 보면 월가 금융인들은 탐욕과 부도덕의 화신이다. 그들은 한탕주의와 승자독식 논리에 빠져 미국을 지탱해온 자본주의 정신을 훼손했다. 그들의 그릇된 윤리의식은 프랭클린의 생활지침을 신주 떠받듯 하며 살아온 대다수 미국민들을 모욕했다. 하지만 월가 금융인들이 자본주의 정신을 망각한 것을 그들의 탓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미국은 더 이상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가 아니다. 특히 미국의 헤게모니는 21세기 첫 10년 동안 급격히 쇠락했다.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금융위기로 미국은 부도덕의 상징이 됐다. 

하버드대 경제학자 로렌스 카츠는 21세기 첫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다. 통계수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지난 10년 동안 일자리 수는 제자리 걸음이었다. 과거 60년 동안 10년 단위로 평균 20% 이상 일자리가 늘어난 것과 대비된다. 실질소득은 1996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위 1% 부자들의 소득은 늘어났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의 수석 경제정책보좌관을 지낸 자레드 번스타인에 따르면 1% 부자의 소득은 지난 10년 동안 중산층과 빈곤층의 실질소득이 감소한 상황에서도 65%나 증가했다.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젊은 세대를 비롯한 미국인들은 희망마저도 꿈꾸지 못하는 상황에 빠졌다. 이들이 의지할 곳은 없다. 현 체제를 바꾸는 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같은 절박감이 이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반월가 시위가 언제까지 갈지, 어떤 형태로 발전할지 속단할 수 없다. 이들의 외침과 행동이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변혁의 시작이 될지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시점에서 미국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프랭클린 다시 읽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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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 등 60개 국가와 국제기구 대표들이 지난 1일 파리에 모였다. 무아마르 카다피를 축출한 반군 대표기구인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이끄는 새 리비아의 출발을 축하하기 위한, 전승국 잔치 같은 자리였다. 한국에서는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대표로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리비아의 친구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과도국가위에 축하선물로 150억달러의 지원을 약속하며 우정을 과시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에 반대해온 중국과 러시아, 브라질도 참석했다. 카다피 이후 리비아 재건 논의에서 제몫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러시아는 염치가 있었는지 회의 직전 과도국가위를 인정하고, 모스크바 초청을 약속했다. 반면 중국은 유엔 주도의 재건을, 브라질은 외부 간섭 배제를 강조하는 독자적인 목소리를 냈다. 


중국과 러시아, 브라질마저 리비아의 친구들로 자처하고 나선 마당에 정작 보이지 않은 친구가 있었다. 아프리카의 경제대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친밀도를 따지면 남아공은 카다피 시절 리비아에 있어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정도다. 카다피는 남아공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항거한 넬슨 만델라와 그가 만든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만델라에게 자신이 만든 ‘카다피 국제인권상’을 처음으로 바칠 정도였다. 만델라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남아공 최고훈장을 카다피에게 수여하고, 로커비 사건으로 곤경에 빠진 그를 위해 대변인 역할을 자처했다. 

 리비아 남자가 호텔 입구의 카다피 사진을 밟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 경향신문DB

만델라의 후계자들도 같은 길을 걸었다. 제이콥 주마 대통령은 지난 3월 카다피를 전쟁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기소하고, 리비아 국민 보호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에 서명했지만 나토의 리비아 공습엔 반대했다. 리비아 사태의 외교적 해결을 위해 카다피를 두 차례나 찾았다. 과도국가위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남아공이 향후 국제무대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음에도 회의에 불참하게 된 데는 속사정이 있다. “아프리카 문제는 아프리카가 해결해야 한다”는, 반제국주의 및 반식민주의 인식이다. 
 
서방은 남아공의 이 같은 행보를 근시안적이라며 못마땅해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리비아 사태 이후 서방의 행보는 과거 카다피 시절과 180도 달라졌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미국과 영국이 카다피에게 보인 행보는 남아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최근 외신 보도에서도 확인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군수업체 제너럴다이내믹스는 리비아 사태가 터지기 한 달 전까지 카다피 정예부대인 카미스 여단과 탱크와 포, 경장갑차의 통신시설을 현대화하는 협의를 진행 중이었다. 인디펜던트는 영국 해외정보국(MI6)과 미 중앙정보국(CIA)이 2004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리비아 테러리스트인 압델 하킴 벨하지를 태국 방콕에서 체포해 리비아로 강제송환했다는 내용의 문서를 폭로했다. 벨하지는 심문과정에서 CIA의 강압적 기법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벨하지가 카다피를 트리폴리에서 축출하는 데 앞장선 반군 사령관으로 변신해 현재 트리폴리 치안유지 책임자로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는 국제사회에서 친구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벨하지는 영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폭로로 새 리비아와 미국·영국 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깨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서방도 카다피와의 의리와 실리 속에서 고민하는 남아공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 남아공이 언제 돌아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과연 누가 진정한 리비아의 친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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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오후, 기자를 찾는 전화가 왔다. 점잖은 목소리의 남성은 북유럽 극우정당의 뿌리를 다룬 기사(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8012110355&code=970205)를 보고 궁금한 점이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다문화주의’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기사 내용과 관련한 내용이 아니어서 답변드릴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다음 번에는 한국의 다문화주의 실태를 다뤄달라”고 부탁했다.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산에 가면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을 폭행하고, 심지어 여자를 성폭행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 며칠 전인 7월26일엔 e메일을 몇 통 받았다. 세계를 뒤흔든 7·22 노르웨이 테러사건 용의자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에 관한 기사가 발단이었다. 브레이비크가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이 포함됐다는 내용(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7261613131&code=970205)이었다. 메일을 보낸 한 분은 “이런 메일을 처음 보낸다”면서 “그렇게 대통령께 막말을 하고 싶으면 제발 우리나라를 떠나주세요”라고 적었다. 신문보다 먼저 실린 온라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댓글만 250여개가 달렸다.


기자생활 20년 동안 이런 일은 많지 않았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고마웠지만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았다. 7·22 테러는 우리 안에 감춰진 또 다른 우리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준 계기가 됐다. 많은 사람이 속내를 털어놨다. 테러의 배경이 된 이민자 및 다문화주의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증오 전화와 댓글, 메일이 넘쳐나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할까.

노르웨이 어린이가 우퇴위아섬 총격사건 희생자들을 기리며 꽃을 던지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DB)



노르웨이 사건 이후 국내 언론이 재조명한 우리 사회의 반외국인 정서는 우려할 만했다. 국내 거주 외국인은 전체인구의 2.6%, 임금노동자의 4%를 차지한다. 다문화가정도 16만2000가구에 이른다. 그러나 일부 동남아 출신 이주민들은 벌레 취급을 당하고 있다. 파키스탄인들이 그렇다. 그들은 ‘파퀴벌레’로 불린다. 파키스탄과 바퀴벌레의 합성어다. 이보다 인종차별적이고 왜곡된 편견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발, 다름을 수용하지 않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노르웨이도 예외는 아니다. 이민자 인구가 10%를 넘어서면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불만이 팽배했다. 제2당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극우정당 노르웨이 진보당 지지자가 약 23%에 달하는 현실이 이를 대변한다. 제2의 브레이비크 출현이 우려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노르웨이 국민의 대응은 놀랄 정도로 차분하다. “열린 사회와 관용을 포기하지 않겠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마녀사냥을 해서는 안된다”(총리), “브레이비크의 형량을 높이는 결정은 패닉 상태에서 해서는 안되고 토론을 거쳐야 한다”(법무장관). 아무리 정치인의 정치적 수사라 할지라도 이쯤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만약 한국에서 이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노르웨이 우퇴위아섬 해변가에 총기난사 사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기리는 꽃과 촛불이 놓여 있다. (출처: 경향신문 DB)



노르웨이 사건이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제 관용의 시대는 끝났다는 경종인가. 배타적 민족주의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인가. 우리 안의 브레이비크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한국은 노르웨이와 달라 애초부터 관용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일까. 일자리를 빼앗는 파퀴벌레들더러 돌아가라고 하고 싶은가. 아닐 것이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주변엔 베트남인 며느리들이 넘쳐난다. 동남아 이주노동자들은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일을 도맡아 해주는 이들이다. 우리는 언젠가 베트남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삼촌이나 고모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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