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기후변화에도 의미 있는 해였다. 온실효과,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같은 용어가 그해 본격적으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해 6월23일, 기후변화의 새 역사가 쓰였다. 40대 후반의 한 과학자가 그날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역사적인 증언을 했다. “지구온난화가 이산화탄소와 다른 온실가스에 의해 강화된다고 99%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증언은 이튿날 ‘지구온난화는 시작됐다’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기후변화가 언론에 처음 대서특필된 순간이었다. 향후 가열되는 기후변화 논쟁의 예고탄이기도 했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훗날 ‘기후변화 선지자’로 불린 미 항공우주국(NASA) 소속 과학자 제임스 핸슨 박사였다.

당시 핸슨 박사가 말한 핵심은 세 가지였다. 첫째, 1988년은 역대 어느 해보다 더운 해라는 점이다. 둘째, 온실효과가 지구온난화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기후에 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온실효과가 폭염 같은 극단적인 사태의 원인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는 2017년까지 지구의 5년 단위 평균기온이 1950~1980년보다 약 1.03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또 워싱턴을 비롯한 4개 도시의 극단적인 날씨 일수를 예측했다. 핸슨의 예측 결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2017년까지 실제 기온 상승폭은 0.82도였다. 4개 도시의 극단적인 날씨 일수는 오히려 핸슨의 예측을 웃돌았다.

그로부터 30년. 핸슨은 자신의 바람과 달리 예측대로 가고 있는 현실에 절망했다. 더욱이 올해 들어 한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가 최고기온을 갈아치울 정도로 지구는 더워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대기권 이산화탄소 농도가 410PPM을 넘어섰다. 지구온난화의 심리적 저지선이라고 불리는 400PPM을 넘어선 지 3년 만이다. 최근에는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손을 떠났다는 섬뜩한 전망까지 나왔다. 8개국 13개 연구기관의 학자들은 지난 6일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현재 지구 곳곳에서 진행 중인 기후변화가 특정한 임계점을 넘어서면 지구가 자정작용을 멈춰 온실가스 감축 등 향후 인류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다는 우울한 내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핸슨 박사도 회한을 드러냈다. 지난 6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로 “기후변화 이야기를 대중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게 하지 않은 점”을 꼽았다.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평가도 냉정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을 쓴 뉴요커 기자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30년 전 핸슨의 증언을 “침울한 이정표”라고 했다. 한 과학사 연구가는 핸슨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묘사했다. 핸슨이 기후변화의 위험을 알린 선지자였지만 대중을 움직이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핸슨은 대중과의 소통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그는 기후변화 반대시위 현장에서 5번이나 체포될 정도로 과학자를 넘어 시민행동가로서의 소임도 다했다. 2012년 봄에는 ‘내가 기후변화에 대해 반드시 외쳐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TED 강연을 했다. NASA에서 은퇴하기 1년 전에 한 이 강연 동영상은 130여만명이 봤다.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빨리 예측하고 알리고자 했던 핸슨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기업의 이해관계에 부응해온 기후변화 부정자들이나 정치인들이 문제다. 그가 회한의 소회를 밝힌 이유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TED 강연 동영상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할아버지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이해시키지 못했다.” 그가 손주들로부터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결국 그를 ‘기후변화 전도사’로 나서게 한 건 미래세대에게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지구를 물려줄 수 없다는 절박감이었다.

핸슨의 역사적인 증언으로부터 한 세대가 지났다. 기후변화는 거대담론이다. 찬반 논쟁이 끊이질 않는다. 핸슨 같은 선지자의 경고보다 에어컨 전기료 폭탄 문제에 우선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핸슨은 존재 그 자체가 희망이다. 그래서 당신이 있었기에 최악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아직도 대처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어 행복하다.

핸슨은 의회 청문회장에 나오기 전날 밤,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경기를 보면서 다음날 날릴 멋진 문구를 떠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청문회에서는 그 말을 깜빡 잊어버렸다. 청문회 뒤 기자회견에서 그가 한 말은 이렇다.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온실효과가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말해야 한다.”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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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5월27일 새벽 4시. 대서양 횡단 독일 여객선 세인트루이스호는 2주간의 항해 끝에 목적지인 쿠바 아바나 해안에 도착했다. 탑승객 937명은 항구의 불빛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대부분이 나치의 핍박에서 탈출하려는 유대인이었다. 자유를 향한 희망에 부푼 이들은 짐을 꾸리고 하선 준비를 했다. 배에 올라온 쿠바 관리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희망은 곧 절망으로 변했다. 당시 6살이던 제럴드 그랜스턴은 쿠바 관리들이 외치는 “마냐나, 마냐나” 말만 반복해 들었다고 회고했다. “내일” 또는 “언젠가는”을 뜻하는 낙관적인 이 말은 배반의 단어가 됐다. 6살 소년조차도 이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배의 입항 및 승객의 하선 금지임을.

‘저주받은 자들의 항해’로 불리는 세인트루이스호의 비극은 5월13일 배가 독일 함부르크를 떠나기 전부터 예정됐다. 쿠바 당국은 애초부터 유대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배가 출발하기 8일 전에 이미 비자를 무효화했다. 선박주는 이 사실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은 모른 채 탑승했다. 유대인 탑승객들에게 세인트루이스호는 마지막 탈출구였다. 선상에서의 일상은 천국이었다. 지상에서 자주 접할 수 없는 식사가 제공됐다. 금요일 밤에는 댄스파티가 열렸다. 영화도 상영됐다. 수영 강습도 열렸다. 히틀러의 흉상은 식탁보로 가려졌다. 로타르 몰톤이라는 소년은 “자유를 향한 크루즈 휴가”라고 했다. 이 모든 것은 독일인임에도 세심하게 배려한 구스타프 슈뢰더 선장 덕분에 가능했다.

하지만 쿠바 아바나 코앞까지 와서도 내릴 수 없는 유대인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한 탑승객은 자해한 뒤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는 정식 하선 허가를 받은 29명만 내려준 채 일주일 만에 미국 플로리다 쪽으로 선수를 돌렸다. 하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행정부는 이들을 거부했다. 선장은 미 연안에 배를 좌초시켜서라도 이들을 탈출시키려고 했지만 미 행정부는 이를 막으려 해안경비대를 동원했다. 캐나다마저 외면하면서 기댈 곳은 유럽 국가뿐이었다.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더라도 독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탑승객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다행히 미국 유대인 단체의 도움으로 영국·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가 907명 전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침내 배는 벨기에 앤트워프 항에 입항했다. 함부르크를 떠난 지 한 달여가 지난 6월17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두가 독일을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 254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됐다.

쿠바와 미국, 캐나다는 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1930년대 세계는 광기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대공황 여파와 나치를 비롯한 파시즘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다. 이성이 설 자리는 애당초 없었다. 독일은 1939년 초 자국 국경 대부분을 봉쇄했다. 많은 나라들은 유대인 이주자 숫자를 줄였다. 쿠바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상 최대의 반유대 시위가 열릴 정도로 반유대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쿠바는 탑승객들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곳은 미국이었다. 미국이 이들을 막은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처럼 ‘미국 우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반이민 정서 때문이다. 2차 대전과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자국 내 독일인을 추방하고 일본인을 억류하지 않았던가. 결국 세인트루이스호 탑승 유대인들의 고난과 역경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오늘날 지중해를 비롯한 전 세계 바다에서 벌어지는 난민들의 목숨을 건 항해를 보면 세인트루이스호 탑승객의 비극적인 운명이 겹쳐진다. 79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이들을 막는 자들의 논리와 사고방식은 물론 세상의 작동원리도 마찬가지다. 난민 배척 역사는 반복되고, 정책은 오히려 악랄해지고 있다. 과거 세인트루이스호 유대인을 받아준 영국·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반이민을 앞세운 극우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다. 2012년 9월 세인트루이스호 난민을 외면한 데 대한 미 국무부의 공식 사과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으로 빈말이 돼버렸다. 호주를 본받아 가혹한 무관용 정책을 채택한 트럼프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으로 여긴다. 지난해 취임 직후 말콤 텀불 호주 총리와 통화하면서 난민 정책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그가 더 악랄하다고 한 트럼프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난민 문제가 지구촌의 최대 관심사가 된 이후 세계 지도자들이 내놓는 해법은 절망적이다. ‘당신들이 탈출한 지옥으로 돌아가라!’ 인간에 대한 예의나 연민 대신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언어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어디에 기대야 하나. 세인트루이스호의 비극을 되새겨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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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미국 뉴욕으로 날아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만났다. 역사적인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불과 13일 앞두고서다. 세 번째 만남이지만 그 의미는 앞의 두 번과 비교가 안된다. 만남 자체가 회담의 청신호다. ‘회담이 성사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없애는 쐐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예상 밖의 기대감까지 일게 한다. 33년 전 미·소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85년 11월4일 조지 슐츠 미 국무장관은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회담을 꼭 보름 앞둔 때였다.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는 11월19~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한 터였다. 슐츠는 왜 모스크바로 날아갔을까.

1985년 미·소 정상회담은 훗날 냉전 종식의 기틀이 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추진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당시 미·소관계는 북·미관계 못지않게 나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주둔, 폴란드 민주노조 탄압은 미국의 반발을 샀다. 강경한 냉전 전사 이미지의 레이건도 문제였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낙인찍고, 군축을 말하면서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해 소련을 자극했다. 그러면서 ‘평화의 십자군’을 자임했다. 소련은 그런 레이건을 ‘현대판 히틀러’라고 비난했다. 소련 지도자들의 건강 악화와 잇단 사망도 장애물이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변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레이건이 신호탄을 쐈다. 그는 1984년 1월 “이 핵무기 시대를 살아나가려면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레이건의 변화를 이끈 이가 슐츠다. 슐츠는 레이건을 정상회담으로 인도한 ‘셰르파’였다. 1982년 7월 국무장관이 된 슐츠는 레이건을 유연하고 실용적인 사고를 갖도록 이끌었다. 1년 뒤 기회가 찾아왔다.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과 젊은 지도자의 등장이었다. 고르비였다. 그는 레이건보다 20살 어렸다. 레이건은 친서를 보냈다. “빠른 시일 안에 워싱턴으로 초대하고 싶다.” 고르비는 긍정적이라면서도 장소와 시기를 이유로 시간을 끌었다. 그 바탕에는 레이건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에게 레이건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일 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7월3일 두 나라는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고르비는 25년 동안 외교장관을 지낸 그로미코를 사임시키고 셰바르드나제를 앉혔다. 외교정책 변화의 신호였다. 하지만 10월이 되도록 의제조차 합의하지 못했다. 슐츠가 모스크바로 간 이유는 마지막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셰바르드나제와 고르비를 처음으로 만나 이견을 조율했다. 마침내 레이건과 고르비는 제네바에서 마주 앉았다. 그러나 세계가 놀랄 만한 합의는 나오지 않았다.

북·미 정상회담을 1985년 미·소 정상회담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상황도, 의제도 다르다. 두 주인공 트럼프와 김정은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럼에도 북·미 정상회담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미·소 정상회담의 교훈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체제가 다른 강대국 간 회담은 한 차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점과 당장의 성과는 없더라도 계속 만나야 일이 풀린다는 점이다. 회담 성사는 군비감축에 대한 레이건의 의지와 미국과의 관계 개선과 내부 개혁을 원한 고르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만남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미·소 정상회담은 ‘셔틀 회담’이라는 새 형식을 낳았다. 레이건과 고르비는 제네바 회담을 시작으로 1988년 뉴욕 회담까지 모두 5번 만났다. 그 결과 1987년 중거리핵무기폐기협정(INF)을 체결하는 등 군비경쟁을 줄이고 냉전의 마지막 시간을 평화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모든 정상회담은 향후 협상의 무대를 위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데이비드 레이놀즈 교수는 1985년 미·소 정상회담 등을 분석해 펴낸 <정상회담>에서 효과적인 정상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두 가지를 제시했다. 지도자와 국가의 힘이 비슷해야 하고, 상호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북·미 간 군사력 차이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과거 트럼프와 김정은의 상호 비방의 역사를 보면 신뢰가 움틀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두 정상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정상회담에 합의했다. 레이건과 고르비의 일련의 정상회담에서 보듯 중요한 것은 두 정상 간의 화학작용, 보좌진의 상호 신뢰, 끈질긴 인내심이다. 6·12 북·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합의가 나올지 알 수 없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한반도 평화 정착의 중차대한 기로에 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도, 비관도 아니다. 차분하게 지켜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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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3·5합의’를 이끌어내자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성과를 깎아내리는 데 바빴다. 그는 3월7일 페이스북에 “남북회담 합의문을 보니 1938년 뮌헨회담을 연상시킨다. 당시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의 수데테란트 합병을 승인해주고 유럽 평화를 이룩했다고 했지만, 이는 히틀러의 속임수에 불과했다”고 썼다. 28일에는 “문재인 정권의 위장평화쇼”라고 했다. 홍 대표가 남북 합의를 “속임수”와 “위장평화쇼”라고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문 대통령에게 ‘체임벌린 이미지’를 씌우기 위함이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리니, 안보를 강조해온 보수 야당으로서는 좌불안석일 터이다. 더욱이 두 회담에서 정전협정을 종전협정 등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은 상상조차하기 싫을 법하다.

홍 대표가언급한 체임벌린과 뮌헨협정은 20세기 국제관계사에서 실패의 대명사로 꼽힌다. 체임벌린은 1938년 9월29일 히틀러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체코 수데테란트를 넘겨주는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1년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협정은 휴지 조각이 됐다. 체임벌린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의 유화정책은 굴욕 외교의 상징으로 낙인찍혔다.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세 차례 회담을 노상강도에 비유했다. “처음에 상대는 권총을 뽑아들고 1파운드를 요구했다. 그걸 주니까 또다시 총을 꺼내들고 2파운드를 요구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파운드17실링6펜스를 받고서 나머지는 미래에 대한 호의의 약속이라고 둘러댔다.”

아이러니하게도 회담 결과에 대한 영국 내 반응은 뜨거웠다. 하루 뒤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평화선언 문서를 들고 귀국한 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도 공항은 환영 인파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는 총리 관저 현관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말실수를 했다. 60년 전 디즈레일리 총리의 유명한 “명예와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되풀이하라는 누군가의 권유에 충동적으로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었다. “우리 시대의 평화가 찾아왔다.” 실수임을 바로 깨달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악몽이 됐다. 그 후 많은 지도자들은 전쟁의 명분으로 체임벌린을 이용했다. 2016년 <협상의 전략>을 쓴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군사개입은 언제나 독재자에게 놀아난 순진한 체임벌린에게 침을 뱉으면서 정당화됐고, 대화와 협상은 가짜평화라는 이름으로 조롱당했다.”

뮌헨회담의 실패는 나약한 평화주의자 체임벌린 탓만은 아니다. 그의 개인적 미숙함과 안이한 정세 판단, 전략 및 팀워크 부재 등 총체적 부실의 결과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뒤집어썼지만 승리는 연합군의 몫이었다. 전쟁을 막을 목적 하나로 히틀러를 세 번이나 만난 그는 죽기 전 말했다. “뮌헨이 없었다면 우리 제국은 1938년에 파괴됐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 체임벌린의 회동 제의를 받은 히틀러도 당황했다. 체임벌린이 전쟁을 위협하러 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결국 체임벌린과의 만남은 이미 전쟁을 결심하고 있던 히틀러의 마음을 돌렸다. 히틀러는 패배 직전 “1938년 전쟁을 시작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지난해 5월 집권한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모든 걸 걸었다. 그 결과물이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다. 문 대통령의 역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공동합의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상회담은 그 이후가 중요하다. 국민과 야당을 설득하는 일이다. 체임벌린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유화정책이 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데이비드 레이놀즈 교수는 뮌헨협정을 비롯해 20세기를 만든 6개 회담을 분석해 펴낸 <정상회담>에서 회담은 유화-억제-데탕트-변모 단계로 진행돼왔다고 분석했다. 남북정상회담 과정도 그랬다. 2000년과 2007년은 유화단계였다. 2008년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 유화단계는 억제단계가 됐다. 문 정부 출범 후 긴장완화 단계를 거쳐 변화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만난 시간은 9월13일부터 29일까지 보름 남짓이다. 하지만 그는 8월 말 비밀리에 히틀러를 단독으로 만나는 ‘Z계획’을 짰다. 이 때문에 함께 히틀러를 만나자는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체임벌린은 1940년 11월9일 눈을 감았지만 ‘체임벌린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사후 80년이 다 되도록 유령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문재인의 시간’은 달려져야 한다. 사후 역사가 평가할 때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모토 ‘평화, 새로운 시작’처럼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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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미국 수도 워싱턴 의회의사당 앞 잔디밭에 신발 7000켤레가 놓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헝가리 파시스트에 의해 죽은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수도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변에 설치된 신발 조각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신발 숫자가 60켤레인 헝가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다. 누구를 추모하려는 퍼포먼스일까. 7000이라는 숫자는 무엇일까. 사실을 알고는 말문이 막혔다. 2012년 12월14일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참사 이후 숨진 어린이 숫자였다.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5년 동안 어린이 7000명이 총기로 숨진단 말인가. 1년에 1300명꼴이다. 하루에 3~4명이 총기에 희생됐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조사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자고 일어나면 총기사고가 터지는 나라가 미국이다. 놀라운 통계는 더 있다. 1968년 이후 50년 동안 총기사고로 숨진 미국인은 150만명이다. 이는 모든 전쟁에서 숨진 미국인(120만명)보다도 많다. ‘신발 퍼포먼스’는 총기에 따른 미국의 비극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총 없는 미국은 상상할 수 없다. 곳곳에서 총기 쇼가 열린다. 최신 총기 모델을 소개하는 광고가 넘친다. 할리우드 영화 속 영웅들은 총을 애용한다. 미국인 100명당 총기 보유 숫자는 90정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총기 소유를 ‘전가의 보도’처럼 여긴다. 수정헌법 2조와 미 총기협회(NRA)의 영향이 크다. 특히 수정헌법 2조는 총기소유 옹호자에게는 성경이나 다름없다. 시대가 바뀐 만큼 수정헌법 2조도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주말인 24일 수도 워싱턴에서는 대규모 행진이 열린다. ‘우리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our Lives)이다. 미 전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도 동참한다. 이 ‘워싱턴대행진’은 지난 2월14일 총기 참사가 일어난 플로리다주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고교생들이 기획했다. 당시 참사로 17명이 숨졌다. ‘더 이상은 안된다’는 심정으로 정치권에 총기규제 법안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주최 측은 참여자가 최대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조지 클루니, 오프라 윈프리, 스티븐 스필버그, 아말, 저스틴 비버 같은 할리우드 스타와 가수 등 소셜테이너들이 대거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여배우 알리사 밀라노도 동참했다. 신발 퍼포먼스도 총기규제 법안을 촉구하기 위한 기획의 하나다. 그 다음날 더글러스고교 참사 한 달을 맞아 미 전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동맹휴업 행진도 마찬가지다. 50개주 3000여곳에서 100만명 가까운 학생들이 함께했다.

학생들이 총기규제를 강화하라고 정치권을 압박하는 것은 이례적이며, 고무적이다. 대형 총기참사가 날 때마다 총기규제 여론은 일었다. 그때뿐이었다. 정치권은 철저히 침묵했다. 샌디훅 참사 이후 미 의회는 단 한 건의 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주 차원에서 총기를 잠금장치를 해 보관하도록 한 곳은 매사추세츠가 유일하다. 그 결과 매사추세츠주는 총기 관련 사망률이 미 전체에서 가장 낮다. 답은 이미 제시됐다. 정치권이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 아쉽게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55년 전 1963년 8월28일. 미 수도 워싱턴 내셔널 몰은 전국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직업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대행진’(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마틴 루서 킹 목사를 비롯해 25만명이 참가했다. 흑인만은 아니었다. 참가자의 약 20~25%는 백인이었다. 그날 킹 목사는 링컨기념관 계단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아직은 어린 저의 네 자녀가 언젠가 자신의 피부색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이… 흑인 소년소녀들이 백인 소년소녀들과 형제자매처럼 손에 손을 맞잡을 수 있으리라는 꿈이… 모든 마을과 부락에서, 모든 주와 도시에서 자유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그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겁니다….” 밥 딜런의 노래 ‘블로잉 인 더 윈드’도 그날 울려퍼졌다.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돼야 무고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달을까요….”

킹 목사의 꿈은 이뤄졌다. 이듬해 미 의회는 민권법을 통과시켰다. 한 해 뒤에는 흑인의 투표권을 회복시킨 투표권법이 제정됐다. 당연히 워싱턴대행진이 촉매제가 됐다. 물론 노예해방선언 이후 오래도록 흑인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55년 전 워싱턴대행진이 그랬듯, 이번 워싱턴대행진이 미국의 총기규제 역사를 바꾸는 기폭제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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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옛소련 간 냉전이 한창일 때 ‘둠스데이 머신(Doomsday Machine)’이라는 게 있었다. 핵전쟁으로, 말 그대로 인류 파멸의 날이 왔을 때 작동하게 만든 행동 프로그램이다. 예컨대 미국이 핵탄두를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쏴 옛소련을 궤멸시키면 옛소련의 둠스데이 머신 ‘죽음의 손(Dead Hand)’ 프로그램이 가동된다. 남은 옛소련의 핵미사일이 미국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 미국의 둠스데이 머신이 작동한다. 문제는 실제로 작동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도 1945년 8월 인류의 첫 원자폭탄 투하 이후 70여년간 둠스데이는 오지 않았다. 물론 아찔한 순간은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미 행정부가 군비경쟁에 한창 열을 올리던 1983년 9월26일의 일이다. 옛소련의 핵 발사 관제센터 컴퓨터에서 미국이 ICBM을 발사했다는 경보가 울렸다. 옛소련 전역의 핵 발사대에 경보가 걸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관제센터 당직자의 냉철한 판단 덕분이었다. 실제 상황이 아닌 컴퓨터 오류로 판단했던 것이다. 인류 절멸을 몇 차례나 가져올 수 있는 핵폭탄을 보유한 상황에서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다. 그동안 둠스데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상호확증파괴(MAD)라는 억제전략 덕분이었다. 적이 핵 공격을 가할 경우 적의 미사일 등이 도달하기 전 또는 도달한 후 남아 있는 전력을 이용해 상대편도 전멸시키는 보복 핵 전략이다. 한마디로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라면 핵 도발을 감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1991년 냉전 종식은 둠스데이 악몽을 잊게 만든 사건이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악몽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지난달 말 미 핵과학자회는 핵 위기 등에 따른 지구 종말을 경고하는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를 ‘자정 2분 전’으로 앞당겼다고 발표했다. 1947년 자정 7분 전에서 출발한 이후 지난해는 지구 종말에 가장 다가간 해였다. 미·소 간 수소폭탄 경쟁이 한창이던 1953년에도 자정 2분 전이었다. 핵과학자회는 역사의 시계가 64년 전으로 돌아간 이유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대응 등을 댔다.

지난해 미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은 미국뿐 아니라 국제사회를 핵전쟁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트럼프의 북한 선제공격 위협을 비롯한 압박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트럼프 스스로 둠스데이 가능성을 높인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8년 만에 발표한 핵 태세 검토보고서에서 소형 핵탄두 개발을 천명했다. 지난해에는 보유 핵탄두 숫자를 10배 늘리겠다고 한 바 있다. 미국발 신냉전이라는 분석이 틀린 말이 아니다. 각국의 군비경쟁을 부추겨 둠스데이 위기를 가속화할 게 뻔하다.

과거에도 북·미 사이에 현재 못지않은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 1968년 1월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969년 4월 미 해군 정찰기 피격 사건,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94년 1차 북핵 위기다. 운 좋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이성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점이다. 과거에 일어난 숱한 전쟁들이 그 증거다. 더욱이 컴퓨터의 오작동이나 인간의 사소한 실수가 둠스데이의 방아쇠가 될 개연성은 여전히 상존한다.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에 임하는 자세다. 북·미 간 긴장이 고조되던 지난해 10월 말, 미 상원의원 8명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 승인 없이는 북한 선제타격을 할 수 없는 법안을 제출했다. 미국의 핵무기 운용을 담당하는 존 하이튼 전략사령관은 11월 “트럼프의 불법적인 핵 명령은 거부하겠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에 따른 북한의 보복 공격으로 초래될 재앙적인 결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미국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런 노력들은 트럼프의 무모한 행동을 억제하는 실질적인 힘이다.

얼마 전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북한 선제공습 반대 결의안 채택”을 주장했다. 미국에서조차 전쟁 반대 목소리가 높은 마당에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만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평창 동계올림픽의 시작으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국회는 주저 말고 관련 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쟁 위기 앞에 갈라진 국회가 해야 할 일이다. ‘전쟁은 결단코 반대한다’는 단호한 목소리만이 우리 위에 드리우고 있는 둠스데이 그림자를 사라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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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전쟁을 조작하라고?” “아니, 실제 전쟁이 아니라 ‘전쟁 쇼’ 말이야.”

재선을 위한 대선을 10여일 앞둔 미국 백악관에 비상이 걸린다. 대통령의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언론은 이미 냄새를 맡은 상태다. 상대 후보에 앞서고 있지만 곧 역전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다. 백악관은 그 방면의 최고인 스핀닥터를 고용한다. 스핀닥터는 정치홍보전문가를 말한다. 그는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와 손잡고 가짜 전쟁을 만들어낸다. ‘전쟁 쇼’는 위력을 발휘한다. 대통령의 성추문 뉴스는 뒷전이고, 대통령은 재선된다.

1997년에 제작된 미국 블랙코미디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 줄거리다. 영화 제목 ‘왝 더 독’은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뜻이다. 주객전도를 의미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위기에 놓인 권력자가 국민의 관심과 여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행위를 일컫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당시 이 영화가 주목을 끈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성추문은 1998년 1월17일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영화가 상영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때다. 클린턴 성추문은 그해 8월 의회 청문회로 이어진다. 바로 그때 영화 <왝 더 독> 같은 일이 벌어졌다. 르윈스키가 청문회에 출석한 이튿날, 클린턴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훈련캠프와 수단의 화학무기 공장에 미사일을 쐈다. 그러나 수단 공장은 화학무기 공장이 아니라 제약 공장이었다. 클린턴도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 전형적인 ‘왝 더 독’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결과는 끔찍했다. 정치적 위기 돌파를 위해 쏜 미사일 한 방에 수단이 생산하는 의약품 절반이 사라졌다. 클린턴 성추문에 대한 관심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미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 탈출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킨 사례는 흔하다. 1983년 10월23일 레바논 베이루트 주둔 미 평화유지군 주둔지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다. 사망자만 241명.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루 동안 가장 많은 미군이 희생됐다. 이틀 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명분은 옛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에 따른 내전 우려였지만 베이루트 참사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대량살상무기 파괴를 명분 삼은 조지 W 부시의 2003년 이라크 침공도 마찬가지다. 눈엣가시 사담 후세인 제거가 목적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버락 오바마는 어떤가. 이라크 철군을 했다가 이슬람국가(IS)가 준동하자 오히려 미군을 증강시켰고, 시리아 공습도 시작했다. 역대 미 대통령들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한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실행자였다.

도널드 트럼프도 '왝 더 독' 전략을 선택할까. 취임 1년이 채 안된 트럼프는 ‘러시아게이트’로 최악의 위기에 빠져 있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칼날은 그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특히 오는 11월 자신은 물론 공화당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 돌파를 위해 그가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잇따른다.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 그룹 대표는 최근 “트럼프가 뮬러 특검의 수사에서 궁지에 몰리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한반도에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진보 지식인 후안 콜 교수(미시간대)는 “트럼프의 지지율 추락과 북한과 이란에 대한 애매하고도 끔찍한 위협이 결합한다면 ‘왝 더 독’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미 트럼프는 낮은 단계의 ‘왝 더 독’ 전략을 구사해왔다. 아랍권을 비롯한 전 세계를 뒤집어놓은 예루살렘 수도 이전 선언,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 형성에 활용한 트위터 정치가 그것이다. 관심은 트럼프의 마지막 카드다. 전쟁으로 갈까. 그 경우 대상은 북한일 수도, 이란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3국일 수도 있다. “화염과 분노”나 “폭풍 전의 고요”처럼 그가 북한을 향해 쏟아부은 말폭탄은 불길한 전조일지 모른다. 트럼프의 북한 공격은 상상조차 싫다.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기를 돌파할 수 있고, 시간을 끌 수만 있다면 트럼프는 불가능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인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트럼프에게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라도 해야 하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바람이 빗나가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두 눈 부릅뜨고 트럼프를 지켜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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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9일 아침(현지시간), 미국 NBC방송의 간판 앵커 맷 라우어(60)의 해고 소식이 전해졌다.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라우어는 1952년 시작된 NBC 아침 뉴스·토크쇼 <투데이>를 21년 가까이 이끈 최장수 진행자였다. 그날 방송 첫머리에 동료의 해고 소식을 전해야만 했던 여성 공동 진행자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믿고 의지했던 동료가 성추행범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라우어는 지난 10월 중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 폭로를 계기로 시작된 ‘미투(나도 당했다)’ 캠페인으로 몰락한 유명인 중 한 명일 뿐이다.

자고 나면 두툼해지는 성추행범 명단에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93)이다. 사진을 찍을 때 “손으로 엉덩이를 슬쩍 더듬는” 나쁜 손버릇이 문제였다. 지금까지 7명이 비슷한 의혹을 제기했다. 고령에다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퇴임 대통령의 성추행이라니. 환하게 웃는 전직 대통령 얼굴 뒤에 음흉한 손이 감춰져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이제 그의 이름 뒤에는 성추행 대통령이라는 꼬리표가 죽어서도 따라다니게 됐다.

미투 캠페인 한 달 보름 새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추락했다. 케빈 스페이시, 더스틴 호프먼 같은 할리우드 스타와 유명 방송 진행자인 찰리 로즈도 성추문이 드러나 망신을 샀다. 코미디언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앨 프랑켄과 하원의원 중 현역 최다선이자 민권운동의 대부인 민주당의 존 코니어스도 정치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끄떡없는 한 사람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여성혐오 이슈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인물이 지난해 대선에서 당선됐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대선을 코앞에 둔 10월,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음담패설 테이프를 공개했다. 2005년 NBC 프로그램 <액세스 할리우드> 진행자 빌리 부시와 나눈 대화가 담겼다. 트럼프는 “당신이 스타라면 여성들의 그곳을 움켜쥘 수 있다”고 했다. 유명인에게는 여성을 성추행·성폭행 할 권리가 있음을 자랑했으니 파문이 클 수밖에 없었다. 여성계는 반발했고, 트럼프의 지지율은 추락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당선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최근 지금까지 트럼프의 성추행을 정식으로 문제 삼은 여성은 13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여기에는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미디어로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포함돼 있지 않다. 트럼프는 이들의 주장을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다. 증인과 증거가 있는 데도 말이다. 트럼프는 왜 이리도 당당한 걸까. 트럼프는 대선 승리를 면죄부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성추행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줬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오산이다. 그의 당선은 남성 우월주의가 지배하는 미국 정치문화와 경쟁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남성 유권자들의 비호감, 트럼프에 대한 백인 저소득층의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뿐이다. 만약 미투 캠페인이 1년 전에 시작됐어도 트럼프는 당선될 수 있었을까. 운이 좋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겉으로는 성추행 문제에 태연자약한 척하지만 트럼프가 속으로 유독 신경 쓰는 일이 있다. 공화당 후보 로이 무어(70)의 성추문 파문 속에서 오는 12일 치러지는 앨라배마주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다. 트럼프에 대한 중간평가인 내년 중간선거의 풍향계가 될 수 있어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패배할 경우 트럼프와 공화당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었던 스티브 배넌을 비롯한 지지자들은 무어 후보 지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한편으로는 비뚤어진 성 의식과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제에 사로잡힌 미국 사회에 대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미투 캠페인으로 제기된 성 평등 의식에 대한 중간평가인 셈이다.

민주당은 앨라배마에서 선거혁명을 이루기 위해 막대한 선거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공화당도 비록 텃밭이긴 하지만 성추문 파장이 커 결과를 쉽게 낙관하지 못하고 있다. 무어 후보는 14세 소녀를 비롯해 여성 9명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더욱이 무어 후보는 공화당 지도부의 후보 사퇴 종용에도 요지부동이다. 어쩌면 그도 지난해 트럼프처럼 유권자의 심판을 면죄부로 삼으려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시대는 바뀌었다. 젠더 감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남성 우월주의에 근거한 성 왜곡 문화는 더 이상 용인되지 않는다. 앨라배마 주민들은 왜곡된 성 문화가 지배하던 추악한 어둠의 역사를 자신들의 손으로 지울 수 있을까.

국제·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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