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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미국, 손 볼 적은 꼭 손 봐준다(2011 5/17 주간경향 925호)

ㆍ냉전시대부터 주요 요인 암살공작 공공연히 자행

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86), 혁명가 체 게바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76), 그리고 알카에다 아라비아지부(AQAP) 지도자인 안와르 알 올라키(41).
이들의 공통점은 미국이 벌여온 ‘암살공작’의 주요 대상에 오른 인물이라는 점이다. 미국 정부가 9·11테러 주동자인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함으로써 미국이 ‘자신의 적’을 제거해온 사례들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은 냉전시절부터 주요 요인에 대한 암살공작을 공공연하게 자행해왔다.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암살공작의 주체는 1970년 중반까지만 해도 미 중앙정보국(CIA)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미군이 직접 나섰다. CIA 암살공작이 국제적인 비난을 사자 1976년 2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행정명령 11905호를 내려 암살을 금지한 것이 계기였다. 하지만 암살공작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으로 되살아났다. 미국은 테러리스트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암살 대신 ‘표적살해(Targeted Killing)’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CIA가 무인비행기 프레데터를 이용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의 알카에다와 탈레반 지도부를 공격하는 것이 표적살해의 대표적인 경우다. 미국의 빈 라덴 제거작전도 표적살해의 결과물이었다.

 

 한 파키스탄인이 5월 4일 이슬라마바드의 프레스 클럽에서 파키스탄 사진작가 마자르 알리 칸이 찍은 오사마 빈 라덴의 사진을 전시하기 위해 걸고 있다. 이슬라마바드/AP연합뉴스

 
쿠바 카스트로, 49년 동안 638차례 시도

미국의 암살공작 대상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카스트로 전 의장이다.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 미국의 앞마당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제거해야 할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됐다. 카스트로가 2008년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49년 동안 총 638차례에 걸쳐 암살 기도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암살 시도는 미 CIA가 직접하거나 CIA가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들이 담당했다. 미 CIA는 카스트로에게 ‘AMTHUG’이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AM은 쿠바를 가리키는 말이고, THUG는 폭력배·암살자라는 뜻이다. CIA는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쿠바의 정보책임자이자 카스트로 경호책임자였던 파비안 에스칼란테에 따르면 담배폭탄과 독가스 볼펜, 미인계 등이 동원됐다. 2007년 CIA가 공개한 비밀문서는 카스트로에 대한 암살공작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서에 따르면 CIA는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전직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을 통해 폭력배와 거물급 마피아를 동원했다. 이들은 총기 사용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독약을 카스트로가 먹는 음식에 넣는 방안을 제안했다. 실제로 독약이 카스트로에게 접근이 가능한 루안 오르타라는 쿠바 관리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오르타가 겁을 먹고 달아나는 바람에 독약을 통한 카스트로 암살계획은 실패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 게바라도 CIA의 주요 암살 대상이었다. CIA는 체 게바라에게 ‘AMQUACK’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쿠바의 돌팔이 의사’라는 의미로, 체 게바라가 의학을 공부한 것을 빗댄 것으로 보인다.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중앙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을 역임하며 사회주의 쿠바 정권의 기초를 세웠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1965년 쿠바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뒤 세계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이듬해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에 몸을 바치며 혁명의 꿈을 이어갔다. 그러나 67년 10월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된 뒤 총살당했다. 체포의 배후에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와 CIA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라크 침공도 후세인 제거가 목적
 

미국은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인물을 제거 또는 체포할 목적으로 다른 나라를 직접 침공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라크의 후세인과 파나마의 노리에가가 대표적인 경우다. 두 사람 모두 한때 CIA의 동업자 또는 하수인이었지만 배신자로 낙인찍인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이 2003년 3월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이라크가 실제론 보유하지 않은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였지만 후세인 제거에 실제 목적이 있었다. 후세인은 미군의 침공 몇 주 후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행방을 감췄다. 미군은 이후 후세인을 ‘체포 0순위’로 올려놓은 뒤 후세인 체포작전 ‘붉은 새벽(Operation Red Fox)’을 전개했다. 미군은 후세인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그해 12월 13일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 인근 농가 지하 땅굴 속에 숨어 있던 그를 체포했다. 후세인은 미군 전범재판에 회부돼 2006년 11월에 사형을 선고받은 뒤 그해 12월 30일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노리에가 체포도 비슷하게 진행됐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를 전격 침공했다. 작전명은 ‘정당한 명분(Operation Just Cause)’이었다. 닷새 전 미국에 대해 전쟁상태를 선포한 파나마군에 의해 미군 장교 1명이 살해당한 것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지만, 민주헌정을 회복시키고 국제 마약거래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체포해 미 법정에 세우겠다는 목적이었다.

2만6000명의 병력을 투입한 미국은 곧바로 노리에가를 수반으로 하는 파나마의 군부 주도 정권을 전복시켰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바티칸 대사관에 망명한 노리에가는 90년 1월 3일 미군에 투항했다. 노리에가는 미국에 압송된 뒤 마약 밀반입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92년 7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15년형으로 감형된 뒤 형기를 마친 노리에가는 살인과 마약자금
 세탁 혐의 등 추가로 제기된 혐의와 관련해 재판을 받기 위해 프랑스 사법당국에 신병이 인도됐다. 현재 노리에가는 7년형을 선고받고 프랑스에서 복역 중이다.

이들과 구별되는 인물이 AQAP 지도자인 알 올라키다. 알 올라키는 예멘계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미국의 표적살해 대상에 올랐다. 미국인에 대한 성전(지하드)을 부추기고 실제로 2009년 11월 텍사스주 포트후드 군기지 총기난사사건과 같은 해 성탄절 비행기 폭파미수사건 등 미국을 겨냥한 테러 기도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이 이유였다. 그는 빈 라덴 이후 알카에다를 이끌 것으로 유력한 아이만 알 자와히리(60)와 함께 앞으로 미국이 제거해야 할 대표적인 적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알 올라키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한, 빈 라덴처럼 ‘표적살해’의 희생자가 될 운명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