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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9/'사바르 비극’이 던지는 질문

기자 초년병 시절인 1992년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따사로운 봄 햇살에 밀려드는 졸음과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선배의 연락을 받았다. 동대문구 창신동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소녀가장을 만나보라는 지시였다. 희미한 조명 아래 실먼지가 날리던 좁은 주택 안 공장에서 조모양이 사장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모양은 당시 16살이었다. 동생과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하루 종일 그곳에서 일했다. 일에 지친 듯, 삶에 대한 희망을 잃은 듯, 그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함께 자리한 두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과 자괴감 탓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들과의 만남은 아직까지도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성인이 된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조모양 3남매가 떠오른 것은 방글라데시 사바르의 ‘라자 플라자’ 의류공장 건물 붕괴 참사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사고가 발생한 이래 사망자수가 12일로 1200명을 넘었다. 건물 붕괴 사고로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난 것은 2001년 9·11일 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건물이 붕괴한 이후 처음일 터이다. 자고 일어나면 100명씩 늘어나는 사망자 숫자를 보노라면 이번 참사가 얼마나 끔찍한지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마한 주택 안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조모양의 당시 노동조건은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하루에 열 몇 시간은 족히 일했을 것이다. 월급을 얼마나 받았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힘들게 번 돈으로 두 동생들과 함께 ‘작은 행복’을 누렸을 법하다. 하루 종일 일한 대가로 방글라데시 소녀들은 월 4만~6만원을 손에 쥐었다. 열악한 환경이지만 공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잔업을 마다하지 않고 번 돈은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등 가족들의 생계의 밑천이 됐다. 하지만 이들이 조모양과 가장 다른 점은 위험이 일상화된 상황에 노출돼 있었으며, 살기 위해 이 사실조차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방글라데시 사바르의 공장건물 붕괴현장에서 사망자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데일리스타(www.thedailystar.net)

글로벌 경제 노동착취 사슬의 맨 밑바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오던 이들이 ‘이윤이라는 이름의 살인’의 희생자가 되자 분노와 함께 노동착취 공장(스왓숍) 문제를 해결하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방글라데시산 의류의 최대 수입처인 유럽연합은 방글라데시에 적용해온 세금·할당량 부문의 일반특혜관세를 제외하는 무역 규제조치를 고려할 것이라며 방글라데시 정부를 압박했다. 이 조치가 이행되면 연 190억달러를 벌어 경제를 지탱하는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은 큰 타격을 받는다.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는 지난 9일 허핑턴포스트 기고에서 “사바르 비극은 국가의 실패의 상징”이라고 했다. 8층짜리 건물을 붕괴시킨 것은 벽에 난 금이었지만 국가시스템의 금을 막지 못하면 국가가 붕괴의 더미 속에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공정 노동’과 ‘소비자 윤리’ 등의 단어들도 다시 등장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8일 최근 확산하고 있는 의류 등 공산품 제조·유통 부문에서의 저임금과 노동착취를 근절하려는 ‘공정노동’ 운동을 소개했다. 어디서 얼마나 정직하게 만들어졌는지를 시시콜콜하게 공개하는 일부 공정노동 의류기업들이 방글라데시 사태 이후 소비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을 불안하게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방글라데시 정부와 국민들이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이 때문에 의류산업이 망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참사 이전인 지난 3월 월트디즈니는 방글라데시를 비롯한 저임국 국가로부터 공장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밝혔다. 동참 기업이 늘어날수록 우려는 현실이 될 게 뻔하다. 이 같은 ‘방글라데시 딜레마’를 피하려 해도 다른 나라의 희생을 낳는 악순환이 불가피하다. 오랜 군사정권하에 있던 버마가 그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값싼 노동력에 바탕을 둔 버마산 제품은 이미 우리 몸의 일부를 감싸고 있다.

방글라데시 공장 붕괴 17일 만의 생존자 구조 (AP연합뉴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꽃은 피어난다. 건물 더미 속에 17일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지난 10일 기적적으로 생환한 여성 레쉬마 베굼(19)이 그 증거이다. 빗물과 소방수 덕분에 살아났지만 어떠한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는 삶에 대한 집념과 용기는 그를 방글라데시의 희망이자 기적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에도 기적이 올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난 8일자 경향신문 8면에 실린 방글라데시 언론인 아예샤 카비르의 특별기고 끝 문장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의류산업이 라나 플라자의 무너져내린 잔해 속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서려면 이 산업과 관계있는 모든 분야에서 깊은 자기 성찰이 꼭 필요하다. 한 푼의 돈을 아끼는 것이 한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가. 공장주에서 기업과 정부와 소비자들까지, 모든 이들의 집단적 자각에 의해서만 이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