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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Ⅰ’ (1907), 138×138cm.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Ⅱ’ (1912), 190×120cm. |
화가 클림트와 그림 속 주인공인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관계와, 이 그림 상속자와 오스트리아 정부간에 벌어진 ‘반환 논쟁’, 그리고 이 작품을 구입한 세계적인 코스메틱 그룹인 에스티 로더 가문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작가와 모델은 연인이었을까?
구스타프 클림트 |
클림트는 ‘블로흐 바우어Ⅰ’을 3년에 걸쳐 그렸다. 화려한 문양과 색채 속에서 불가사의한 눈빛과 감각적인 입술을 가진 모습으로 부인을 그려낸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부인이 어릴 때 사고로 불구가 된 오른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왼손으로 감싸는 것으로 표현했다. 부인에 대한 클림트의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클림트는 또 이 작품 이후에도 ‘입맞춤‘을 비롯한 그림에 부인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 때문에 예술사가나 20세기초 빈의 연대기작가 사이에서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 실제 사진. |
알트먼 여사는 언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클림트와 숙모가 연인관계라는 소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당돌한 질문을 하느냐. 두 사람은 지성적인 친구 관계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트먼은 ‘로망스’가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당시 세기말적 퇴폐분위기가 지배하던 유럽 상류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작품 구매자 로널드 로더 |
알트먼 여사를 비롯한 5명의 상속인은 2000년 미국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오스트리아 정부 역시 법원에 소를 제기했으며, 결국 미 연방대법원까지 가게 됐다. 미 대법원은 2004년 6월 알트먼이 미국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시했으며, 오스트리아 중재법원은 지난 1월 상속인의 손을 들어줬다. 반환이 결정된 작품은 당초 6점 가운데 부인의 초상화 2점과 ‘너도밤나무’(1903) ‘사과나무’(1912) ‘아터호숫가 우터라흐의 집들’(1916) 등 5점이다.
‘반환 논쟁’으로 유명세 치르기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을 최고가로 구입한 사람 로널드 로더(62)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적인 코스메틱 그룹인 에스티 로더의 둘째 아들인 로더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 스쿨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대학과 벨기에 브뤼 셀대학에서 국제경영학을 공부했다. 1986~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다. 경제전문지 ‘포춘’이 지난 3월 재산이 약 28억 달러라고 밝힌 그는 클림트와 그의 제자인 독일 화가 에르곤 실레의 작품 컬렉터로 알려져 있으며, 2001년 11월 소장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 5번애비뉴와 86번가에 ‘노이에 갈러리’를 세워 운영중이다.
로더는 성명을 통해 “이 매혹적인 그림으로 클림트는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을 창조했다. 우리는 노이에 갈러리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을 영원히 소장할 수 있어 감격스럽다”고 밝혔다. 알트먼 여사는 로더와 거래한 이유에 대해 “(반환 소송중) 로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너그러운 데다 끊임없는 후원자였다”면서 “숙모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가장 적당한 곳은 ‘노이에 갈러리’”라면서 거래에 만족을 표시했다.
현재 미국 ‘LA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에서 이달말까지 전시중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Ⅱ’를 비롯한 5점의 클림트 그림은 7월 13일부터 9월 18일까지 ‘노이에 갈러리’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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