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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사연’ 많은 그림이 값어치도 높다(2006-07-06)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Ⅰ’ (1907), 138×138cm.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Ⅱ’ (1912), 190×120cm.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화풍을 지배했던 장식미술 양식인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1907년 작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가 5월 19일자 ‘뉴욕타임스’ 보도를 통해 회화 작품 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 달러에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품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2004년 5월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416만8000달러에 낙찰된 기존 최고가 회화 작품인 파블로 피카소의 1905년 작품 ‘파이프를 든 소년’을 넘어 최고가 작품으로 등극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또 ‘최고가 작품 가치가 있느냐’ ‘작품이 최고가로 팔렸다고 해서 최고의 화가라고 할 수 있나’ 따위의 논쟁은 논외로 치더라도 ‘입맞춤‘(1908)과 더불어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은 미술 호사가나 일반인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화가 클림트와 그림 속 주인공인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관계와, 이 그림 상속자와 오스트리아 정부간에 벌어진 ‘반환 논쟁’, 그리고 이 작품을 구입한 세계적인 코스메틱 그룹인 에스티 로더 가문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작가와 모델은 연인이었을까?

구스타프 클림트
가장 관심을 끄는 점은 작품의 주인공인 블로흐 바우어 부인과 화가 클림트의 관계다. 이 작품은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남편 페르디난트 블로흐 바우어가 의뢰해 그린 것이다. 부인의 초상화는 이번에 팔린 작품과 1912년 작품 등 2점이 있다. 각각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과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Ⅱ’로 불리는 두 작품은 같은 화가가 그렸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색감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블로흐 바우어Ⅰ’이 황금빛 화려하고 따뜻한 분위기라면 ‘블로흐 바우어Ⅱ’는 청색 계통의 차가운 느낌을 준다.

클림트는 ‘블로흐 바우어Ⅰ’을 3년에 걸쳐 그렸다. 화려한 문양과 색채 속에서 불가사의한 눈빛과 감각적인 입술을 가진 모습으로 부인을 그려낸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부인이 어릴 때 사고로 불구가 된 오른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왼손으로 감싸는 것으로 표현했다. 부인에 대한 클림트의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클림트는 또 이 작품 이후에도 ‘입맞춤‘을 비롯한 그림에 부인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 때문에 예술사가나 20세기초 빈의 연대기작가 사이에서는 두 사람이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 실제 사진.
블로흐 바우어 부인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빈의 유명한 은행가의 딸인 부인은 자신보다 17살 연상의 오스트리아 제당사업가 페르디난트와 결혼한 뒤 빈 사교계를 누비다 43살을 일기로 1925년 사망했다.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질녀이자 이 그림의 상속자인 마리아 알트먼 여사(90)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숙모가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알트먼 여사는 “(숙모는) 항상 심각한 표정이었으며 처진 흰 드레스를 입고 여성 흡연자가 이상하게 보인 시절에 황금 담뱃갑을 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또 블로흐 바우어 부인은 파티를 자주 열어 유명 예술인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초대 손님 중 하나였다. 그러나 부인은 자식 복은 없었다. 3명의 자녀를 출산했으나 한 명을 3일 만에, 나머지 두 명은 수 시간 만에 죽었다. 질녀인 알트먼 등이 부인의 초상화를 상속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알트먼 여사는 언젠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클림트와 숙모가 연인관계라는 소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당돌한 질문을 하느냐. 두 사람은 지성적인 친구 관계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트먼은 ‘로망스’가 있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당시 세기말적 퇴폐분위기가 지배하던 유럽 상류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작품 구매자 로널드 로더
이 작품이 유명세를 타는 또 다른 이유는 ‘반환 논쟁’이다. 반환 논쟁의 요지는 1938년 당시 독일의 나치 정권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이 그림을 포함해 블로흐 바우어가 소장한 작품을 압수했기 때문에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의 불을 지핀 인물은 빈 출신의 언론인 후베르트 체르닌이다. 체르닌은 1998년 부인의 유언장 등을 추적해 관련 기사를 미국 신문 ‘보스턴글로브’에 기고했다. 부인은 남편 앞으로 “남편이 사망한 이후 클림트의 작품인 내 초상화 2점과 풍경화 4점을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넘겨줄 것을 요청한다”는 유언장을 남겼다. 즉 남편 사망 전까지 작품의 소유권은 남편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나치 정권이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점령하면서 남편은 다른 나라로 도주했다. 나치 정권은 이 작품을 압수해 3점은 빈에 있는 오스트리아 갤러리에 소장하고 나머지 2점을 팔았다.

알트먼 여사를 비롯한 5명의 상속인은 2000년 미국에서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반환소송을 제기했다. 오스트리아 정부 역시 법원에 소를 제기했으며, 결국 미 연방대법원까지 가게 됐다. 미 대법원은 2004년 6월 알트먼이 미국에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시했으며, 오스트리아 중재법원은 지난 1월 상속인의 손을 들어줬다. 반환이 결정된 작품은 당초 6점 가운데 부인의 초상화 2점과 ‘너도밤나무’(1903) ‘사과나무’(1912) ‘아터호숫가 우터라흐의 집들’(1916) 등 5점이다.

‘반환 논쟁’으로 유명세 치르기도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을 최고가로 구입한 사람 로널드 로더(62)도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적인 코스메틱 그룹인 에스티 로더의 둘째 아들인 로더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 스쿨을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대학과 벨기에 브뤼 셀대학에서 국제경영학을 공부했다. 1986~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다. 경제전문지 ‘포춘’이 지난 3월 재산이 약 28억 달러라고 밝힌 그는 클림트와 그의 제자인 독일 화가 에르곤 실레의 작품 컬렉터로 알려져 있으며, 2001년 11월 소장한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 5번애비뉴와 86번가에 ‘노이에 갈러리’를 세워 운영중이다.

로더는 성명을 통해 “이 매혹적인 그림으로 클림트는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을 창조했다. 우리는 노이에 갈러리에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을 영원히 소장할 수 있어 감격스럽다”고 밝혔다. 알트먼 여사는 로더와 거래한 이유에 대해 “(반환 소송중) 로더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너그러운 데다 끊임없는 후원자였다”면서 “숙모의 초상화가 있어야 할 가장 적당한 곳은 ‘노이에 갈러리’”라면서 거래에 만족을 표시했다.

현재 미국 ‘LA카운티 뮤지엄 오브 아트’에서 이달말까지 전시중인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Ⅰ·Ⅱ’를 비롯한 5점의 클림트 그림은 7월 13일부터 9월 18일까지 ‘노이에 갈러리’에서 전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