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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경향의 눈

[경향의 눈23] 루스벨트호의 교훈(210729)

“우리는 전쟁 상황에 있지 않다. 이번 팬데믹으로 한 사람의 승조원도 불필요하게 잃을 수 없다.” 지난해 3월31일 언론에 공개된 e메일이 미국을 발칵 뒤집었다. 발신인은 미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호 함장 브렛 크로지어 대령이었다. 수신인은 그의 해군 상관과 동료 10명이었다. 당시 남중국해와 필리핀해에서 작전 중이던 루스벨트호는 코로나19에 뚫렸다. 승조원 약 5000명 중 확진자가 100명에 이르는 상황이었다. 확산 방지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때였다. 그래서 크로지어 함장은 3월30일 승조원 대부분을 항모에서 하선시킬 것을 요청하는 e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e메일이 하루 만에 공개되자 파문이 일었다. 수뇌부는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언론 보도 이틀 뒤에는 그의 지휘권을 박탈했다. 그가 하선하던 날 약 2000명의 승조원들은 박수를 치며 “캡틴 크로지어”를 연호했다. 지휘권 박탈이 수뇌부의 코로나19 대응이 잘못됐음을 부각시켜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지휘권 박탈은 찬반 논란을 불렀다. 크로지어의 직위를 해제한 해군장관 대행은 닷새 뒤 사임했다. 그의 사임 뒤 크로지어 복직 요구가 들끓었다. 함장의 e메일로 시작된 루스벨트호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의 반전 드라마는 거기까지였다.

그해 6월 해군 조사, 올해 2월 국방부 감사 결과는 다른 의미에서 반전이었다. 두 조사의 결론은 크로지어의 잘못이다. 해군 조사는 항모 내 거리 두기 규정 위반과 승조원 하선 지체 등을 문제 삼았다. 다만 e메일을 보낸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e메일 때문에 함장직을 박탈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의 함장직 복귀는 물 건너가 버렸다. 국방부 감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확진자 격리 조기 해제, 지속적인 집합장소 개방, 비필수적인 소변검사 실시 등을 규정 위반 사례로 들었다. 해군 지휘부의 문제점도 밝혔다. 해군 구성군사령부 5곳 중 4곳이 2년마다 해야 하는 감염병 대비 훈련을 실시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당연히 감사 결과에 반발이 일었다. 민주당 상원의원 두 명은 해군 조사 결과가 공개되자 크로지어를 복직시키지 않은 데 의문을 제기했다. “해군의 결정은 크로지어 직위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퇴행적인 기준과 사후 절차와 관행을 적용한 것 같다.” 코로나19 유입 차단 실패 책임을 함장에게 전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해군은 항모 초유의 집단감염으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승조원 90%가 확진자로 판명된 청해부대 문무대왕함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에 대해 국방부가 감사를 벌이고 있다. 집단감염 경로, 초기 대응의 적절성, 지휘보고 체계, 방역지침 적용 여부 등이 대상이다. 집단감염 사태 후 많은 의혹들이 제기됐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첫 감기환자 발생 이후 대응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보면 의문투성이다. 우선 함장의 대응이다. 첫 감기환자가 발생한 뒤 합참에 보고하기까지 8일이 걸렸다. 이미 가벼운 기침이나 발열 등 미세한 증상 발현 시 즉시 보고하라는 지침이 하달된 터였다. 함장이 왜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는지는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합참이 보고받은 뒤 전 승조원을 대상으로 한 항체키트 검사를 지시하지 않은 경위도 밝혀야 한다.
 
사실 문무대왕함이 처한 조건과 상황은  루스벨트호와 다르다. 그렇지만 함장의 대응은 비교된다. 루스벨트호 감사 결과는 함장의 영웅적 행위 뒤에 가려진 것들을 드러냈다. 부하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리더십에 따라 신속·과감한 행동을 했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현장과 지휘부의 유기적인 협조와 지휘보고 체계의 투명성이 중요하다는 것, 루스벨트호 사태의 중요한 교훈이다. 루스벨트호 사태는 밀폐된 전함에서 감염병 발생 시 참고할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전범이다. 해군과 국방부가 루스벨트호 사태의 전말을 파악해 교훈을 제대로 숙지했는지조차 의심이 든다. 만약 알고도 이행하지 않았다면 명백한 직무유기다.
 
많은 이들이 국방부 감사를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군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루스벨트호 사태에서도 보듯 감사 결과에 의문이 남아서는 안 된다. 감사의 생명은 투명한 조사를 통해 신뢰할 만한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희생양을 만들거나 꼬리 자르기식 편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감사 목적이 진상규명과 관련자 문책뿐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개선해 재발을 방지하는 데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방장관은 장관직을 걸고 한 점 의혹도 없도록 샅샅이 파헤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