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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월드프리즘

[월드 프리즘18]테러세력으로 낙인찍힌 미얀마의 무슬림( 2015.06.09ㅣ주간경향 1129호)

미얀마 무슬림들은 군부의 통치 정당성 확보와 미국의 중국 봉쇄를 위한 아시아 회귀전략, 그리고 대권을 꿈꾸는 수치 여사의 침묵 때문에 ‘인종청소’ 위기에 처해 있다.

온 세계의 시선이 미얀마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족의 ‘보트피플’ 사태에 쏠리던 지난 5월 25일. 미국의 진보매체 인터셉트는 미얀마 당국이 지난해 9~11월 무슬림 10여명을 테러조직 가입을 이유로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테러조직의 이름은 ‘미얀마 무슬림군(MMA)’. 변호인들과 안보전문가들은 MMA는 없으며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얀마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이 조직의 실체와 관련한 증거를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는 데다 11월 총선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군부의 정치적 계산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미얀마의 무슬림 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지금까지의 무슬림 박해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로힝야족을 ‘무국적자’로 낙인 찍어 공동의 적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나머지 무슬림마저 ‘테러 위협세력’으로 몰아 뿌리를 뽑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무슬림 박해와 관련해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그 배경에 미국이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대 무슬림 로힝야족의 ‘보트피플’ 사태
인터셉트에 따르면 지난해 테러조직 가입 혐의로 체포된 무슬림은 자체 확인만으로도 최소 18명에 이른다. 한 시민단체는 지난 2월 그 숫자가 100명 정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에게 적용한 법은 1950년에 만들어진 비상대책법이다. 주로 반정부 인사를 자의적으로 감금할 목적으로 활용돼 왔다. 지난해 11월 17일 제2 도시 만달라이에서 체포된 무슬림 등 5명의 변호사는 검찰이 법원에 관련 증거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실의 조 타이는 인터셉트에 “관련 증거가 있지만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MMA의 존재를 처음 밝힌 이는 싱가포르에서 ‘정치적 폭력 및 테러 국제연구센터’를 운영하는 로한 구나라트나다. 미확인 보도를 전제로 그가 최근 “MMA라는 새로운 조직이 생겨났으며, 태국 영토 안에서 미얀마 무슬림을 대상으로 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언급한 것이 전부다. 하지만 테러전문가나 인권단체, 심지어 미국 국무부조차 MMA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은 구나라트나가 언급한 것 이상의 어떠한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동남아시아 전문가 자카리 아부자도 “미얀마 정부와 싸우는 조직이라면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미얀마라는 국명을 사용하지 않는다”면서 “완전히 지어낸 것 같다”고 했다.

미얀마 정부의 조직적인 무슬림 박해를 피해 탈출한 로힝야족 ‘보트피플’이 지난 5월 20일 인도네시아 이스트 아체 해안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 5월에만 주변국 해안을 떠도는 로힝야족 보트피플은 3500명이나 됐다. / AP연합뉴스


미얀마 무슬림들은 어쩌다 잠재적인 테러 위협세력이 됐을까. 계기는 미국이 2001년 9·11 테러를 빌미로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이었다. 미얀마 군사정권의 고립을 위한 국제적 지지를 겨냥한 심산이었지만, 문제는 미얀마에서 최근 수십년 동안 어떠한 테러 공격 기록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미얀마는 테러 위협세력 낙인찍기를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오는 11월 총선이 치러진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 장군들로서는 대내외적으로 권력 장악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좋은 기회다. 테러 위협의 부상은 미얀마 군이 민주주의 국가의 안보를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을 선전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도 손해볼 것이 없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전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핵심 대외정책인 아시아 회귀전략인 ‘피봇 투 아시아’다. 2011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포린폴리시에 ‘미국의 태평양시대’라는 기고를 통해 밝힌 것으로, 2000년대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중동에 집중해 온 미국이 외교·군사정책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전략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G2로 부상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무슬림 박해 배경에는 ‘미국 정책’도 한몫
유엔이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소수민족’이라고 한 로힝야족의 수난의 배경에도 이 전략이 깔려 있다. 미국으로서는 중국의 거점이 된 미얀마와 관계개선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로힝야족 박해를 묵인·방조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2009년 인도양~미얀마~중국 윈난성을 잇는 원유 및 가스관 공사계약을 미얀마와 체결했다. 아프리카·중동의 원유 및 가스 공급처를 다변화할 목적이지만 유사 시 미국이 말라카 해협을 차단하는 경우에 대비할 의도였다. 하지만 미국과 미얀마의 화해 분위기 조성으로 상황은 역전됐다. 중국이 36억 달러를 투자한 미트소네 댐 건설계획은 2011년 9월 백지화됐다. 그해 11월 오바마, 12월 클린턴이 잇따라 방문해 미얀마 정부를 회유·압박한 덕분에 민주화운동 지도자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그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이 이듬해 4월 보궐선거에서 첫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무슬림의 박해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 아웅산 수치 여사. / 영국 텔레그래프 웹사이트 캡처

미국과 유럽의 지원으로 2011년 문민정부로 전환한 이후 미얀마에서 로힝야족의 학살사건이 일어난 것은 1년여 만인 2012년 6월이다.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에 따르면 그해 5월 28일 로힝야족 남성 3명이 한 불교도 여성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것이 계기였다. 로힝야족 주 거주지인 서북부 라카인주에서는 미얀마 경찰의 방관 속에 이뤄진 불교도들의 조직적인 보복으로 그해 가을에만 280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유엔난민기구는 2012년 이후 ‘보트피플’이 된 이가 8만6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2013년에만 615명이 사망했다. 타국에 도착한 이들을 기다라는 것은 몸값을 노린 인신매매 조직과 죽음이었다. 물론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의 뿌리는 이보다 훨씬 깊다. 8세기부터 미얀마에 터전을 잡은 로힝야족은 2차 세계대전 때인 1941년 일본이 미얀마를 침공했을 때 식민종주국 영국 편에 서면서 불교도와 갈등이 시작됐다. 현재의 유혈사태를 낳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8년과 1991년에 벌어진 로힝야족에 대한 군사정권의 탄압이었다. 45만명이 강제로 탈출했으며, 다시 돌아온 많은 이들이 라카인주에 거주하게 되면서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미얀마 정부는 1982년 국적법에 따라 그들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대신 로힝야족을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체류자라는 의미로 ‘벵갈리’라고 부른다. 수치조차도 그들을 로힝야 대신 무슬림으로 부르고 있다. 국가에 의해 공공의 적이 된 이들은 이동·고용·교육·보건·출산 등 모든 사회활동을 엄격히 제한받고 있다. 또 도로 건설과 같은 정부 프로젝트에 무임금으로 강제로 동원되거나 상품과 동물 교환 또는 안전한 여행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주변국들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 로힝야족의 박해를 외면하고 있다지만 수치 여사는 왜 침묵하고 있을까. ‘대통령을 향한 욕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수치는 최근 2년간 외국인과 결혼한 자에게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 헌법 개정에 주력해 왔다. 내년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보니 교도소 담벼락을 걷듯 신중한 행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여전히 의회 의석의 4분의 1(110석)과 헌법개정을 비토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또 로힝야족을 지지하는 말을 할 경우 불교도들의 반발을 살 우려가 있다. 전체 5000만명 가운데 3%도 채 되지 않는 130만명에 불과한 무슬림에 기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영국 런던대 페니 그린 교수는 최근 인디펜던트 기고에서 “인종학살에서 침묵하는 것은 공범이나 다름없는데, 수치 여사가 그러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얀마 무슬림들은 군부의 통치 정당성 확보와 미국의 중국 봉쇄를 위한 아시아 회귀전략, 그리고 대권을 꿈꾸는 수치 여사의 침묵 때문에 ‘인종청소’ 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는 로힝야족의 박해를 나치 시절 유대인 박해에 비유했다. 그는 5월 26~28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나치의 인종학살과 유사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다행이라면 대량학살 단계까지 가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량학살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소로스의 말을 위안 삼아야 할까. 어쩌면 대량학살은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