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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2]유승민과 송우석(2015.07.21ㅣ주간경향 1135호)

두꺼운 법전 속에 갇혀 있던 헌법 조항이 다시 한 번 책 밖으로 나왔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8일 사퇴의 변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3년 개봉된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 변호사(송강호 분)가 국가보안법 위반을 다루는 법정에서 고문경찰 증인과 ‘국가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인용한 헌법 1조 2항만큼이나 뭉클했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송우석의 열변의 압권은 다음 말이었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헌법 1조 1항 언급으로 지난 13일간 속이 검게 탔을 유 전 원내대표의 심경을 어느 정도 헤아려 볼 수는 있지만 본심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유 전 원내대표를 개인적으로 전혀 모르지만 헌법 조항을 말하는 것으로 미뤄 ‘원칙주의자’일 거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홍종호 서울대 교수의 글과 유시민 작가(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은 내 짐작을 확인시켜줬다. 홍 교수는 안철수 캠프에 몸 담았고, 유 작가는 박근혜 대통령과는 반대 쪽에 있는 사람이라 지레 반새누리당 정서일 거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두 사람은 유 전 원내대표와는 서울대 경제학과 후배라는 인연이 있다.

유 전 원내대표를 형이라고 부르는 홍 교수는 7월 2일 페이스북에 올린 ‘내가 본 유승민’이라는 글에서 “그의 성정을 한마디로 하자면 ‘거친 따뜻함’이다”라고 했다. 따뜻하지만 까칠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는 원칙주의자의 품성에 가까운 특징이다. 유 작가는 팟케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57편에서 유 전 원내대표를 ‘엘리트주의자’로 표현했다. 그런데 “‘나 잘났어’ 하는 그런 엘리트가 아니라 ‘정말 아닌 일은 안 해도 되지 않아’라는 쪽의 엘리트”라고 했다. 유 작가 분석의 정수는 다음 말에 있다. “엘리트들은 정말 자존심 상하고 비굴하게 느껴지는 일을 잘 못한다. 자기주장이 있고 견해가 있어 굽히는 건 가능한데 비굴하게 느껴지면 ‘내가 뭐 굳이 그렇게까지 살아야 돼’ 그런 게 있다.” 유 작가의 분석을 미당 서정주식 화법으로 말하면 ‘유승민을 키운 것은 8할이 엘리트주의였다’쯤 되겠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헌법이 자주 책 밖으로 외출하는 나라는 아무래도 정상 상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이 실종된 한국에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어디로 가려나, 하는 물음이 절로 나올 법하다.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처럼 박 대통령에게 멋진 ‘하이킥’을 날린 유 전 원내대표는 여당 안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혔을까. 새누리당이 달라지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는 송우석이 될 수 없다. 2할의 ‘시련’으로는 8할의 ‘엘리트주의’ 벽을 절대로 깨지 못할 테니까.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