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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83]봄날은 간다(2017.03.28ㅣ주간경향 1219호) 탄핵 선고를 받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 며칠 뒤 인왕산에 올랐다. 불과 일주일 전과 공기부터 달랐다. 봄기운이 만연한 듯했다. 새싹들과 새순들의 아우성에 무거운 머리가 이내 맑아지는 걸 느꼈다. 어느 정도 오르자 청와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탄핵 전과 후, 멀리서 바라보는 청와대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마는 주인 없다는 씁쓸함이 상념의 한자락을 불러냈다. 29년 전 88서울올림픽 전후 기간 동안 나는 대전 시가가 내려다 보이는 식장산 정상부에 있었다. 군복무 중이었는데, 정상에 있는 방송사 중계탑 보호가 우리의 임무였다.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준 것은 대전 시내 야경과 북쪽으로 희끗 보이는 대청호였다. 당시 대청호 그 어딘가에 있을, 가본 적 없는 대통령 별장 청남대를 떠올리며 권력의 무상.. 더보기
[편집실에서82]박근혜 없는 나라(2017.03.21ㅣ주간경향 1218호)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기 열흘 전쯤부터 불안한 내 마음을 달래준 이들이 있다. 정태춘과 안도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리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출퇴근버스 안에서 나는 정태춘의 노래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무한반복해 들었다.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이 대목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덕수궁 돌담길 한쪽에 자리잡은 설치작품 ‘연탄재 위에 핀 꽃’을 보고는 안도현을 만났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는 그의 시구가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졌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구 “확실성은 아름답지만 불확실성은 더욱 아름답다”는 고백컨대, 지인이 전해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첫.. 더보기
[편집실에서81]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2017.03.14ㅣ주간경향 1217호)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에 나온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왜 나왔느냐”는 한 어르신의 질문에 말똥말똥 묵묵부답이다.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계속되는 어르신의 채근에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린 채 사라진다. 인터넷과 SNS에 떠도는 동영상은 이런 그에게 ‘어벙 김문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을 맡고 있는 그는 탄핵 기각을 당론으로 채택하자는 의견까지 냈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발언으로 악명을 날린 김진태 자유한국당 의원도 태극기 집회의 단골손님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변호인으로 활동한 김평우·서석구 변호사는 주말이면 태극기를 온몸에 두른 시위꾼으로 변신해 탄핵 기각을 외친다. 김 변호사는 신문에 태극기 집회를 선동하는 광고까지 냈다. 이들은 탄핵정국이 탄생시킨 대표.. 더보기
[편집실에서80]멈출 수 없는 최순실 재산 추적(2017.03.07ㅣ주간경향 1216호) 얼마 전 한 월간지가 유력 대선후보를 표지사진으로 내세우고 집권 플랜 기사를 다룬 적이 있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잡지가 나온 지 얼마 안 돼 그 후보가 대선 출마를 없었던 일로 해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잡지사의 당혹감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이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언론은 시간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그 후보에 대한 출마 포기 압력이 있었고, 사퇴할 수 있다는 예측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그럴 건지는 당사자만이 아는 일이었다.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그런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최순실 국정농단 특검의 활동시한 만료(2월 28일) 나흘 전이다. 대통령 권한대행 황교안 총리는 특검 연장 여부.. 더보기
[편집실에서79]끝없는 기다림(2017.02.28ㅣ주간경향 1215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던 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밤잠을 설쳤을까. 나라 걱정, 경제 걱정, 삼성 걱정 등 저마다의 걱정거리를 품고 평소보다 일찍 눈을 뜬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목적은 달랐다. 마감날이면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 늦게 자는 게 일상이 됐지만 이날은 지면 걱정이 다른 때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구속은 안 그래도 정신 없는 마감날을 더 부산하게 만들 게 뻔했다.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체크했다. 내가 정한 예상시간이 지나도 관련 뉴스가 뜨지 않았다. 졸면서 기다렸다. 난데없이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에 관심을 갖고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을까. 장담컨대 새벽에 열리는 스포츠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서만큼은 아닐 .. 더보기
[편집실에서78]56세 퇴임 대통령 오바마의 행보(2017.02.21ㅣ주간경향 1214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좌충우돌 행보에 세계가 휘청일 때 카리브해 푸른 바다로부터 신선한 사진이 날아왔다. 어린아이마냥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영국 기업가 리처드 브랜슨 버진그룹 회장과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었다. 보름여 전 헬리콥터를 타고 백악관을 떠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라진 오바마가 사실상 퇴임 후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시기심과 질투심의 발로인가. 즐거운 표정의 오바마 모습을 보자 몇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오바마는 왜 억만장자 브랜슨의 초청에 응했을까. 오바마는 자신의 사진이 공개되는 것을 원했을까. 원했다면 그 의도가 무엇일까. 그리고 사진 공개로 더 큰 이득을 보는 쪽은 오바마일까, 브랜슨일까. 첫 번째는 자연스런 궁금증의 소산일 뿐이다. 두 번째와 세 .. 더보기
[편집실에서77]트럼프 ‘리얼리티쇼’에 놀아난 세계(2017.02.14ㅣ주간경향 1213호) 어떤 나라에서든 헌법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불길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가 비정상 상황이나 위기에 처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일주일 만에 수정헌법 25조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25조는 대통령 유고 시 승계절차를 규정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트럼프를 탄핵해 대통령 자리를 부통령에게 물려주자는 얘기다. 취임 일주일 만에 탄핵이라니. 8년 전 버락 오바마가 취임 일주일 만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다.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다. 지난해 집권 5년 만에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에 이어 브라질 대통령이 된 미셰우 테메르에 대한 탄핵안이 제출된 것도 취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보수 진영 쪽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나오니 반트럼.. 더보기
[편집실에서76]채널 9번만 보는 ‘혼족’들(2017.02.07ㅣ주간경향 1212호) 최근 방영된 을 보다 몇 차례 빵 터졌다. 이번 미션은 ‘국민MC’ 유재석이 자신을 모르는 사람을 찾는 거였다. 유재석은 ‘1일 게스트’ 김종민과 함께 강원도 정선군의 오지마을을 찾는다. 노인들만 사는 곳이라는 이유에서다. 마을회관에서 KBS 1TV 교양프로만 보는 91세 할머니가 모를 것이라는 결정적 제보를 듣는다. 유재석은 할머니와의 첫 대면에서 미션에는 성공하지만 ‘굴욕’을 당한다. “혹시 저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모르겠는데….” 하루 종일 TV를 보고 모든 프로그램을 다 좋아한다면서도 자신을 모른다는 말에 충격 받은 유재석은 TV 케이블채널을 돌린다. 설상가상. 그날따라 자신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없다. 그때 할머니로부터 나온 말에 빵 터졌다. “TV에 본래 안 나오는구먼, 뭘.” 이 다음이 .. 더보기
[편집실에서75]권력자 식의 말하기 시대는 끝났다(2017.01.24ㅣ주간경향 1211호) 말은 권력이었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용어가 있다. 이세고리아와 파레시아다. 이세고리아는 평등한 말하기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전쟁에서 아테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꼽은 것이 바로 이세고리아다. 참주제, 독재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파레시아는 자유롭게 말하기 또는 진실 말하기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진실, 자유, 비판을 파레시아의 3요소로 꼽았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죽음까지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말하기 역사는 정치권력이 신에서 영웅(왕)으로, 영웅에서 다시 시민으로 바뀐 것과 같은 궤적을 보인다. 물론 시민은 오늘날의 시민이 아니다. 아테네에서 태어난 남성으로, 여성과 외국인, 노예는 포함되지 않는.. 더보기
[편집실에서74]노란 종이비행기(2017.01.17ㅣ주간경향 1210호) 책꽂이 한쪽 구석에 노란 종이비행기가 놓여 있다. 겉에는 ‘잊지 않기 위해’라고 쓰여 있다. 종이비행기는 왜 거기 있을까. 종이비행기를 펼쳐본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2년 전 약속 오늘 다시 되새겨봅니다. 그리고 그 약속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2주기인 오늘 다짐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하겠습니다. 별이 된 모두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날의 추억이 회한으로 되살아난다.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아 뒤늦게 달려갔던 팽목항. 거기에서 아이들에게 보내려고 버스 안에서 꾹 눌러 쓴 편지. 세찬 비바람 탓에 날리지 못하고 품속에 간직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종이비행기. 날릴 수만 있었다면 중력, 추력, 항력, 양력의 원리를 넘어 무한비행으로 천국으로 보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