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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45]스크린도어 안팎과 그 사이 어디에도 없는 자들(2016.06.14ㅣ주간경향 1180호)

지하철역에 처음 스크린도어가 설치됐을 때 ‘그 기준이 뭘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지하철역 내 사고를 계기로 스크린도어가 설치됐으니 안전이 최우선 고려사항이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용객이 많은 역이 0순위였을 것이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불온한 생각이 스멀스멀 일었다. 혹시 지역 차별은 없을까. 힘 없는 동네 역이 힘 센 동네 역에 밀리는 상황 말이다. 스크린도어에 붙은 광고판을 보면 돈 거래가 설치 순위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억을 더 더듬어 보면 스크린도어가 설치되기 전에는 ‘안전선’이라는 게 있었다. 선로에서 조금 떨어진 플랫폼에 그어진 노란색 선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안전선 안과 밖이 헷갈린 것이다. 열차가 도착할 때면 방송이 흘러나온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 왜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야 하나. 승객 입장에서 보면 안전선 밖은 선로 쪽이다. 방송에 나오는 안전선 밖이라는 표현은 기관사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안전선 안쪽에서 기다려 주십시오”로 바뀌었다.

스크린도어가 없었다면 열아홉 살 비정규직 청년 김군의 죽음은 단연코 없었을 것이다. 앞서 스크린도어 공사 중 숨진 3인도 마찬가지다. 승객을 위한 안전장치가 비정규직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은 잔인한 역설이다. 스크린도어는 누구를 위한 안전장치인가. 스크린도어 안과 밖에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안전하다고 느낄까. 스크린도어 안쪽에 있는 누군가는 ‘지옥철’ 안에 피곤한 몸을 앉힐 자리가 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성추행의 손길만이라도 없기를 기도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스크린도어 바깥, 즉 열차 안에 있는 이들은 앉을 자리는커녕 짐짝 신세와 매캐한 땀 냄새마저도 감내하는 서민들이다. 김군은 스크린도어 안과 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안팎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 노출된 위험 속에서 희생양이 됐다. 어쩌면 스크린도어는 현대인의 신분을 나누는 장벽이자 이 시대의 모순을 안고 있는 창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는 스크린도어 안과 밖, 그 사이 어디에도 없는 자들이 있다. 국회의원이나 기업가, 고위공무원들이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을 탈 리가 없는 이들은 서민들의 고통을 단 한 뼘도 체감하지 못한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라는 애도 트윗을 올렸다가 오히려 안이한 인식을 드러냈다고 언론의 뭇매를 맞은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그렇다. 국회에서 구의역까지 지하철을 타는 서민 코스프레를 연출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행동은 ‘정치 쇼’였다.

이들은 일이 터질 때마다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시민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스스로 권한과 의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산업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들에게는 국가와 정부의 실패는 없고, 개인의 실패만 있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다. 이런 인식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바뀌지 않는다. 이들은 철저한 구경꾼일 뿐이다. 분노와 행동은 추모하는 시민들의 몫이다. 이들이야말로 사건의 관찰자이자 역사의 증인이다. ‘내가 다음 희생자일 수 있다’는 공감의 확산만이 오만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최소한 목숨을 지킬 수 있다. 스크린도어 앞에 서보지 않은 자들이 어찌 그 아픔을 알겠는가.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