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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13/끝나지 않은 오키나와의 비극

지난 11일 오후 일본 오키나와 본섬 남쪽 끝 해안가에 있는 평화기원자료관을 찾았다. 오키나와 현정부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유일한 지상전이 벌어진 오키나와전쟁의 교훈과 영구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자료관을 둘러보다 제4전시실 한쪽 벽에 붙은 글에 눈길이 갔다. 일본어로 쓴 길지 않은 글이었다. 한국어로 된 자료관 안내서에는 이렇게 번역돼 있었다. “오키나와전의 실상을 접할 때마다 전쟁이라는 것처럼 잔인하고 이렇게 오욕투성인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생한 체험 앞에서는 어떠한 사람도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전쟁을 용납하지 않는 노력을 할 수 있는 것도 우리들 인간이 아닐까요. 전후 이래 우리들은 모든 전쟁을 원망하며 평화로운 섬을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얻은 확고한 우리들의 신조입니다.” 1시간가량 자료관에서 본 전쟁의 참상이 오키나와전쟁의 비극을 겪은 섬주민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과 함께 온몸에 전해지는 듯했다.

자료관 방문은 지난 7일부터 5박6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와 주한미국대사관이 마련한 주일 미군기지 탐방 프로그램의 곁가지였다. 하지만 도쿄 근교의 요코다 공군기지와 요코스카 해군기지, 오키나와의 후텐마 해병기지 등 미군기지를 둘러보면서 느낀 것만큼이나 의미가 컸다. 미·일동맹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미국의 묵인 아래 진행되는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의 군사대국화 움직임과 집단적 자위권 행사 추진을 위한 헌법개정 움직임을 오키나와만큼 잘 보여주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4월28일, 오키나와 문제가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이날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날이지만 오키나와인들에겐 미국에 넘어간 굴욕의 날이다. 정부 주관으로는 처음 열린 도쿄의 일본주권회복의 날 행사엔 일왕이 참석했고, ‘천황폐하 만세’ 삼창이 울려퍼졌다. 반면 같은 시간 오키나와에서 열린 굴욕의 날 행사장은 분노로 들끓었다.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 바로 오키나와 갈등의 본질이다.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갈등은 1879년 류큐국이 일본에 강제복속되면서 시작됐다. 450년 역사의 류큐국은 오키나와현이 되면서 고유의 언어와 문화가 파괴됐다. 태평양전쟁 땐 본토수호라는 명분 아래 수많은 민간인이 강요에 의해 자결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종전 후에는 일본이 오키나와를 미국에 제공함으로써 오키나와 주민들은 전쟁에 이어 또다시 버림받았다.

조찬제 국제부장(출처 : AP연합)


그런 오키나와가 미국에 넘어간 뒤 일본 복귀운동을 벌였다. 강제복속과 지상전이라는 아픔의 역사를 지닌 오카나와가 왜 그랬을까. 바로 일본의 평화헌법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베 정권은 그 헌법을 바꾸려고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를 오키나와에 군사기지를 계속 확산시키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후텐마를 비롯한 미군기지 이전 움직임에 역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프로그램이 주일 미군기지를 탐방하는 목적이어서 이 문제에 대한 오키나와 관계자의 입장을 직접 듣진 못했다. 대신 귀국해서 본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파노라마>의 ‘일본을 보는 두 가지 테마 2편 국경의 섬 오키나와’(9월5일 방송)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전후 50년이 되던 해에 평화 염원을 담을 ‘헌법9조의 비’를 세운 야마우치 도쿠신 전 요미탄 촌장의 말이다. “지금의 오키나와 투쟁이 승리했을 때 일본의 미래가 있습니다. 만약 오키나와의 투쟁이 패배하면 일본 정부는 자신있게 헌법개악을 쏜살같이 추진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키나와의 투쟁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는 <희생의 시스템 후쿠시마 오키나와>(돌베개·한승동 역)라는 책에서 희생의 시스템으로 오키나와 문제를 설명한다. “희생의 시스템에서는 어떤 자의 이익이 다른 것을 희생시킴으로써 산출되고 유지된다. 희생시키는 자의 이익은 희생당하는 것의 희생 없이는 산출되지 못하고, 유지될 수도 없다. 이 희생은 통상 은폐돼 있거나 공동체의 ‘소중한 희생’으로 미화되고 정당화된다.” 그에 따르면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와 미·일 안보조약의 희생자이다. 또 일본은 여전히 이런 시각으로 오키나와를 바라보고 있으며, 미·일 안보조약이 여전히 주민들의 삶을 옥죄고 있다.

귀국한 지 1주일이 지났지만 수시로 오르내리던 후텐마 기지의 수직이착륙기 오스프리와 기지 한쪽 입구에서 철수운동을 벌이던 주민 6명의 모습이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와 겹쳐 눈앞에 아른거린다. 일본 면적의 0.6%에 불과하지만 주일 미군시설의 74%가 집중된 곳이기에 주민들의 외침은 분명 설득력 있다. 하지만 다카하시 교수의 지적처럼 오키나와는 여전히 희생의 시스템 속에 갇혀있다. 오키나와가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끝나지 않은 오키나와의 비극이 있다.

조찬제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