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해변가에는 상어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추어 사진가다.” 지난 11월 중순 정보수집 천국이 된 세상과 그에 따른 사생활 침해 문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기사 도입부는 120여년 전인 1890년 코닥 휴대용 카메라가 가져온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당시 신문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누구든 휴대용 카메라로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을 훔쳐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일 터다. 말하자면 정보수집 도구로서의 카메라 시대 도래의 부작용을 지적한 셈이다.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120년을 뛰어넘어 정보수집 도구가 카메라에서 폐쇄회로(CC)TV를 지나 차량용 블랙박스와 구글안경으로 진화된 이 시대의 풍경을 전하고 있다. 정보수집은 다방면에서 혜택을 주지만 사생활 침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기사는 보여준다. 실제로 누구나 다른 사람을 감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사생활 보호 문제는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 기사를 보니 몇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우선 언젠가 집 앞 사거리 교차로에 설치된 방범 및 불법 주정차 감시용 CCTV다. “과연 CCTV 만능국가로구나” 하던 기억이 새롭다. 밤늦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내 모습을 외박이 눈알을 통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을 리 없으니 말이다. 또 하나는 블랙박스에 대한 유혹이었다. ‘걸어다니는 지도’임을 자부해온 나였기에 차에 내비게이션을 설치할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런 내가 무슨 블랙박스, 하면서도 솔직히 마음이 끌렸다. 자동차 사고가 나 책임 소재를 두고 시비가 붙었을 때를 생각하면 블랙박스는 어느 광고처럼 변호사 역할을 톡톡히 할 테니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잠시, 결국은 국가의 시민감시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에드워드 스노든에게로 옮아갈 수밖에 없다.
스노든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비밀 정보수집 활동을 폭로한 지 반년이 됐다. 그의 폭로로 불법 정보수집 관행이 사라지리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세계 시민사회에 국가 감시의 폐해를 알리는 경종이 될 것으로 여겼다. 실제로 그의 폭로에 세계가 공분했다. 비밀 정보수집 행위가 국가의 시민사회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노든이 제기한 문제의식은 옅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스노든 폭로 이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그 스스로 미국이 간첩죄로 기소할 것을 우려해 러시아로 피신했다. 스노든의 폭로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도 갈수록 부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달 21일 공개된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 여론조사에서 스노든의 NSA 폭로가 국가안보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응답은 60%였다. 넉 달 전보다 11%포인트 오른 것이다. 스노든 기소 지지 비율은 52%였다. 말하자면 미국인들은 국가안보를 위해 NSA의 감시활동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 셈이다.
혹시 우리 스스로 국가의 시민감시와 사생활 침해는 별개의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CCTV 때문에 범법자가 된 듯한 더러운 기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봐줘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국가의 감시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줄은 잊어버린 채 엄습해오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불안함에 숨죽이며 살고 있진 않은지. 자기가 다른 사람을 감시하는 것은 용인하면서 그 반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진 않는지. 나의 일이 아닐뿐더러 모두의 문제여서 아무런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안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머잖아 CCTV와 블랙박스, 구글안경을 뛰어넘는 새로운 감시기기들은 필연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런 기기들의 등장은 국가의 시민감시보다 개인의 사생활 문제에 더 신경쓰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이런 기기들이 한 사람이나 국가권력 손에 들어갈 때 다른 사람의 자유는 빼앗길 수밖에 없다. 물론 타인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NSA를 통해 각종 정보를 모은 미국의 국가 이미지가 그 때문에 실추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시 스노든을 생각할 때다. 주변을 둘러보면 그가 제기한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함을 쉽게 알 수 있다. 국가권력은 여전히 시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NSA 사태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는 게 아니라 새로운 통치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어쩌면 역사는 국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려는 권력자와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민들 간의 투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NSA 파문은 국가권력의 시민감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교묘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CCTV가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안도감에 묻힐수록 국가의 감시 기제는 강화될 것이다. 스노든의 폭로는 이어질 것이다. 스노든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국가의 감시활동에 제동을 걸 것인지, 아니면 빅 브러더에 저항하다 결국 굴복하고 마는 <1984>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처럼 살기를 원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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