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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77]트럼프 ‘리얼리티쇼’에 놀아난 세계(2017.02.14ㅣ주간경향 1213호)

어떤 나라에서든 헌법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불길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 나라가 비정상 상황이나 위기에 처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일주일 만에 수정헌법 25조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25조는 대통령 유고 시 승계절차를 규정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트럼프를 탄핵해 대통령 자리를 부통령에게 물려주자는 얘기다. 취임 일주일 만에 탄핵이라니. 8년 전 버락 오바마가 취임 일주일 만에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일만큼이나 어처구니없다.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다. 지난해 집권 5년 만에 탄핵된 지우마 호세프에 이어 브라질 대통령이 된 미셰우 테메르에 대한 탄핵안이 제출된 것도 취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보수 진영 쪽에서도 같은 목소리가 나오니 반트럼프 진영의 정치 공세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인 엘리엇 코언은 “트럼프가 일주일 만에 최악의 대통령이 됐다”면서 헌법과 미국 역사를 모르는 그가 미래 역사책의 한 장을 차지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독재국가라면 몰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기도 쉽지 않다.

“예상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다.” 트럼프 집권 2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쯤 될 것이다. 미 언론에는 쿠데타, 전쟁 같은 표현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전임 행정부의 정책을 뒤집는 것이 유행이라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정도가 심하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막강한 권한인 행정명령 서명건수를 예로 들어보자. 트럼프가 취임 열흘 동안(1월 30일까지) 서명한 행정명령은 19건이다. 세계적 반발을 일으킨 반이민 행정명령과 합참의장·미 정보기관 총책임자인 국가정보국장(DNI)을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에서 배제한 것이 대표 사례다. 특히 반이민 행정명령은 지식인 사회에서 ‘보도에 흩어진 쓰레기’ 취급받고 있다. 트럼프가 언급한 팩트 자체가 오류투성이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임자 오바마가 8년 동안 서명한 행정명령은 277건이다. 1년 평균 35건으로, 120년 만의 최저 수준이라고 한다.

트럼프를 일방주의로 내달리게 한 두 날개는 미국 우선주의와 독선주의다. 미국 우선주의는 국익을 앞세운다는 말이다. 독선주의는 독재나 다름없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독재도 서슴지 않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정책 또는 통치 방향인 셈이다. 트럼프의 당선이 보여주듯 미국 우선주의는 먹혀들었다. 공약대로 그는 보호무역주의, 반이민 정책을 행동에 옮겼다. 독선주의자 또는 독재자의 면모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 전략가의 중용에서 볼 수 있다. 합참의장과 국가정보국장을 배제하고 NSC 상임위원이 된 배넌은 트럼프의 최측근이다. 측근 정치야 역대 정권마다 있었지만 정도 문제다. 미국 원로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는 두 사람의 통치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트럼프는 연극하고 배넌은 정책을 만든다. 배넌이 행정명령을 작성하면 트럼프는 서명한다.” 이쯤 되면 트럼프와 배넌의 관계는 최순실에게 국정을 맡긴 박근혜나 다를 바 없다.

국익이야 어느 나라든 맨 앞에 세우는 정책이니 비판할 수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자로 군림하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대통령직을 리얼리티쇼 진행자쯤으로 여기고 있을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삶은 피폐해질 것이 분명하다. 트럼프 사례는 입으로는 국가와 국익을 외치면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독선주의자가 지도자가 됐을 때 초래할 결과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내가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신념을 위해 결코 죽지 않겠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주변에는 나를 포함해 이 말을 되새겨야 할 이들이 너무나 많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702071458531#csidx65c174082c125db8a021688ee57f8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