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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11]연대의 힘, ‘나디에’에서 ‘캐러밴’으로(181214)

 마리아를 알게 된 건 멕시코 다큐멘터리 <나디에>(2005)를 통해서다. 2006년 여름 EBS가 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EIDF)에서 소개했으니 벌써 12년이 지났다. 입술을 깨문 채 애써 담담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 두려움, 막막함, 절망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연이 표정 뒤에 감춰져 있는 걸까.

 ‘나디에’는 스페인어로 ‘하찮은 사람’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뜻한다. 다큐에서는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중미 3국에서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가려는 불법 이민자를 가리킨다. 마리아는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제작진이 마리아를 만난 곳은 멕시코 남동부 베라크루스주 내륙 도시 오리자바에 있는 불법 이민자 캠프였다. 4000㎞에 이르는 미국행의 4분의 1 지점이다. 마리아는 오는 동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강도들로부터 집단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동료들이 있었지만 총으로 무장한 강도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감행한 미국행이지만 미국에 가기도 전에 꿈을 짓밟혀버린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북쪽으로 이동하던 어느 날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다. 마리아는 미국으로 갔을까.

 <나디에> 속 불법 이민자들이 겪는 고초는 말로 헤아릴 수 없다. 돈을 강탈당하기 일쑤다. 마리아처럼 성폭행당하는 여성도 흔하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도 하찮게 여기는 악명 높은 갱단 ‘마라 살바트루차(MS-13)’는 이들의 길목을 노린다. 경찰과 이민국 직원도 한통속이다. 약자의 고통을 어루만지기는커녕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일 뿐이다. 불법 이민자들은 당해도 하소연도 못한다. 그 순간 본국으로 송환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참는 수밖에 없다. 단지 나디에라는 이유로 이 모든 걸 감수해야 하는 건 정당한가.

 세밑에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마리아를 불러낸 건 두 장의 사진이었다. 하나는 올해 중반 미국에 입국한 엄마가 국경수비대원으로부터 몸수색을 당하는 걸 보고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는 여자아이다. 생후 22개월 된 아이의 이름은 야넬라다. 당시 이 사진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불법 이민자에 대한 무관용 정책인 가족 격리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정책은 많은 비난을 샀다.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19세기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묘사했듯 새 빈민구제법 실시라는 미명하에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아이들을 고아원에 수용했던 가족 격리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야넬라 사진은 트럼프의 가족 격리 정책 철회의 일등공신이 됐다. 다른 하나는 지난달 국경수비대가 쏜 최루탄에 혼비백산하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기저귀를 찬 아이에게 최루탄을 쏜 행위에 세계는 경악했다. 국경수비대가 불법 이민자에게 최루탄을 쏜 것은 처음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3년에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목표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에게 최루탄을 쏘는 행위는 불길하다. 국경에서의 최루탄 발사가 일상화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나디에>에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국경은 불법 이민자들이 결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어서일까. <나디에> 이후 12년이 지났지만 국경의 살벌한 풍경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야넬라와 최루탄이 명백한 증거다. 오히려 장벽은 높아지고, 길어지고, 견고해졌다. 불법 이민자들의 대응 방식 또한 크게 달라졌다. 바로 ‘나디에’가 ‘캐러밴’이 된 것이다. 나디에가 보잘것없는 개인을 상징한다면 캐러밴은 연대의 힘을 상징한다. 캐러밴은 더 이상 나디에가 아님을 보여주는 불법 이민자들의 행동이다. 야넬라나 최루탄 세례를 받은 아이들도 캐러밴의 일원이다. 캐러밴은 무지막지한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을 줄이고, 안전하게 국경까지 인솔하는 ‘코이요테’를 고용하는 데 드는 1만달러를 아낄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1750년대 몰려드는 독일 이주민을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존재”라고 했다. 초대 연방대법원장을 지낸 존 제이는 가톨릭 신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장벽 설치를 제안했다.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건국 이전부터 존재할 정도로 뿌리 깊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트럼프도 이민자 후손이다. 그의 무관용 정책이 새해 들어 수그러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디에가 캐러밴이 됐다고 해서 미국 국경 장벽을 쉽게 넘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캐러밴의 강고한 연대만이 뿌리 깊은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것 또한 분명하다. 캐러밴의 행진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