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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국에서

[편집국에서13] 김정은, 워싱턴 갈까(190308)

1987년 12월7일, 옛 소련 지도자 고르바초프(고르비)가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옛 소련 지도자로서는 세 번째 방문이었다. 레이건과의 세 번째 회담이기도 했다. INF 조약 서명은 군축과 냉전 종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라이트는 다른 데 있었다. 마지막 날 미국인으로부터 받은 환대였다. 백악관에서 차를 타고 가던 고르비는 차를 세우고 군중들에게 다가갔다. 백악관 산책으로 불리는 고르비의 돌발행동에 경호원들은 경악했지만 미국은 고르비 열풍에 사로잡혔다. 고르비 인기는 회담 닷새 뒤 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서 증명됐다. 고르비에게 우호적 인상을 받은 미국인은 65%였다. 61%를 기록한 레이건보다 더 많았다.

1년2개월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1986년 10월, 두 정상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두 번째 만났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어떠한 합의는 물론 기자회견조차 없었다. 3차 회담 전망도 불투명했다. 회담 실패 원인은 스타워스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한 이견이었다. 회담 동안 거친 신경전이 벌어졌다. 한 단어가 문제였다. 고르비는 연구용으로 제한할 것을 원했다. “양보할 수 없어요.”(레이건) “그것이 나의 마지막 요구조건입니다.”(고르비) “그 한마디 때문에 모든 것을 수포로 돌리려 합니까.”(레이건) “나 또한 똑같은 말을 당신에게 할 수 있습니다.”(고르비) “이렇게 헤어지면 너무 안 좋군요. 우리는 협정을 맺을 뻔했어요.”(레이건) “나는 협정을 원했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습니다. 원 없을 정도로.”(고르비)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또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레이건)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고르비)

다시는 못 만날 것 같던 두 사람이 워싱턴에서 재회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복잡한 국내외 사정이 있었다. 레이건은 레이캬비크 회담 직후 치러진 중간선거에서 상원의 영향력을 잃었다. 그건 SDI 추동력 상실을 의미했다. 반면 SDI를 군축과 연계하려는 고르비의 시도를 중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85년 1차 제네바 회담 직전에 터진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레이건 행정부 도덕성에 치명타가 됐다. 레이건에게 이를 만회할 대외정책이 필요했다. 이것이 고르비의 INF 추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고르비의 사정도 비슷했다. 국내에서는 자신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반발이 컸다. 미국은 인권 문제와 아프가니스탄 사태로 압박했다. 고르비는 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가택연금 해제와 아프간 철수 선언으로 두 장애물을 제거했다.

저서 <정상회담>에서 레이건-고르비의 회담을 다룬 케임브리지대 데이비드 레이놀즈 교수는 레이캬비크는 실패했지만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일대일 정상회담의 장점이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얼마나 심하게 요구했는지, 또 얼마나 과격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이놀즈 교수는 낙관주의자 레이건이 제네바에서의 긍정적인 인상을 믿고, 인간 고르비가 레닌주의를 극복할 것이라는 감을 잡았다고 했다. 고르비도 회담 전까지 레이건을 초강대국을 이끌기에 적절하지 않은 ‘바보 광대’라고 말했지만 레이캬비크 이후 레이건을 결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두 정상 간 환상적인 케미는 하룻밤 새 찾아온 게 아니었다. 제네바 회담 때부터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오면서 만든 결과였다. 이후 레이건의 모스크바 답방, 고르비의 뉴욕 방문이 이어졌다. 그렇게 두 정상은 임기 동안 모두 다섯 차례 회담을 했다.

북·미 정상 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후 비핵화 협상 전망에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3차 회담 개최 여부도 안갯속이다. 이런 상황에서 30여년 전 이야기는 부질없어 보일 터이다. 당시 미·소와 지금 북·미 상황은 비교 대상이 안된다. 더욱이 트럼프는 레이건이 아니고,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고르비가 아니다. 하지만 김 위원장-트럼프의 두 차례 회담은 공교롭게도 고르비-레이건의 셔틀 회담 과정과 닮은꼴을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도 레이캬비크 이후의 레이건-고르비와 다를 바 없다.

김 위원장도 워싱턴에 갈까. 지금은 꿈같아 보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행히 두 나라 모두 추후 회담 의지를 드러내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두 정상 간 신뢰와 상호존중, 문제해결 의지가 있다면 비관할 이유가 없다. 김 위원장의 워싱턴 방문이 실현된다면 트럼프의 평양 답방도 가능하다. 32년 전 고르비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워싱턴으로 가 군축과 냉전 종식의 초석을 닦았듯 김 위원장이 워싱턴으로 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