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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61]‘옥토버 서프라이즈’를 기다리며(2016.10.18ㅣ주간경향 1197호)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없었다’. 최근 외신을 보다 이런 제목에 눈길이 갔다.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 뒤져봤다. 이런 내용이었다. 지난 4일 새벽(미국 동부시간)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의 시선은 독일 베를린에 쏠렸다. 비리 폭로 전문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설립한 줄리안 어산지가 중대발표를 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와 매체 쪽에서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한 한 방이 될 것이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옥토버 서프라이즈’는 일부 친트럼프·반클린턴 매체 쪽에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만든 말이었다. 클린턴과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새벽까지 졸리는 눈을 비비며 지켜봤다. 그러나 기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상에 등장한 어산지는 “미국과 관련한 중대발표를 한다면 새벽 3시에 하지 않는다”는 말로 트럼프 지지자들을 한 방 먹였다. 클린턴 진영에서 안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산지는 대선에 영향을 주는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밝혀 양측에 기대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겼다.

이 에피소드는 어산지와 그가 만든 위키리크스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을 잠 못 이루게 한 이날은 위키리크스 설립 10주년 기념일이었다. 트럼프 지지자들로서는 어산지가 뭔가 폭로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을 법하다. 어산지는 지난 7월 클린턴이 대선후보로 추대되는 잔칫날인 전당대회 바로 전날 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클린턴에게 유리하게 경선을 편파 관리한 정황을 담은 이메일을 폭로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한편으로는 어산지와 클린턴의 악연도 되새기게 한다. 악연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봄 위키리크스는 ‘부수적인 살인’이라는 동영상과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 일지를 공개해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렸다. 2개의 전쟁을 하던 미국의 추악함이 고스란히 폭로됐다. 그해 11월 말에는 메가톤급 폭탄을 터뜨린다. 국무부 외교전문이다. 이 전문 공개로 미국이 독일, 프랑스, 영국, 사우디 등 우방국 지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2012년에는 관타나모 수용소의 실상을 고발하는 문서도 공개했다. 모두 클린턴의 국무장관 시절 일이다. 외교전문에서 우방국을 적과 동지로 구분한 사실이 드러나자 클린턴은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미국 대외정책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한 공격”이라고 역공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대결에서 승자는 물론 클린턴이다. 위키리크스가 지금까지 공개한 문건은 1000만건이다. 하루 평균 3000건에 이른다. 단어로는 100억개나 된다. 그런데도 클린턴은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어산지와 위키리크스는 미 행정부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됐다. 미 정부는 어산지를 간첩죄로 기소하려 하고 있다. 어산지는 2012년 6월 이래 영국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 있다. 그가 대사관을 떠나는 순간에는 스웨덴 정부가 성폭행 혐의와 관련해 그를 송환할 것이다. 그 뒤에는 미국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마당에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다면 그의 입지는 더욱 더 좁아질 게 뻔하다.

위키리크스는 설립 이래 최대 위기에 빠져 있다. 오죽하면 어산지가 10주년 회견에서 폭로 대신 연대와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을까. 어산지도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대선에 영향을 미칠 자료를 폭로해 존재감을 과시할지, 아니면 허풍선이가 될지.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위키리크스의 힘은 국가권력에 굴하지 않고 비리를 폭로하는 데서 나온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전히 ‘옥토버 서프라이즈’가 기다려진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