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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66]170년이나 기다리라고?(2016.11.22ㅣ주간경향 1202호)

지난달 26일 세계경제포럼(WEF)은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현 추세라면 남녀 간 임금격차가 같아질 때까지 170년이 걸린다는 전망이었다. 지난해 전망보다 52년이나 더 늦춰진 것이다. 맙소사, 2186년이 돼야 남녀 임금이 같아진다고?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170년이나 기다릴 수 없다’는 프랑스 여성 직장인들이 지난 7일 오후 4시34분을 기해 직장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조기퇴근’ 시위였다. 연말까지 매일 이 시간에 퇴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근데, 왜 ‘오후 4시34분’이었을까. 현재 프랑스 여성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 남성이 이 시간까지 일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임금을 약 15%를 덜 받는다. 남녀 소득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는 아이슬란드에서 시작됐다. 1975년 이후 아이슬란드는 매년 10월 ‘여성의 휴일’ 시위를 한다. 올해는 10월 24일 오후 2시38분에 했다. 프랑스보다 조기퇴근 시간이 빠른 이유는 아이슬란드가 WEF가 발표한 ‘성 격차 지수’ 1위 국가여서다.



미국 대선 하루 전에 벌어진 프랑스 여성들의 시위는 힐러리 클린턴의 패배로 빛이 바랬다. 대선 결과는 성평등과 여권신장을 요구해온 여성들에게 악몽이었다. ‘이단아’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자 아내는 흥분했다. 미국 남성들이 아직 여성 대통령을 원치 않는다고 단언했다. 많은 여성들이 비슷한 심경이었으리라. 실제로 백인 남성 지배의 역사가 끝나는 데 대한 위기감을 느낀 백인 남성들이 결집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출구조사에서 이런 경향이 드러났다. 두드러진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혐오 발언을 일삼아온 트럼프에 대한 여성 지지도(42%)가 클린턴의 남성 지지도(41%)보다 높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백인의 투표성향에서 트럼프가 클린턴을 압도했다는 점이다. 백인의 클린턴 지지율은 37%였지만 트럼프는 57%였다. 특히 고졸 이하 백인의 경우 트럼프는 67%를 얻어 28%인 클린턴을 크게 따돌렸다. 이 때문에 ‘저학력 중하층 백인 남성의 반란’이라고 불린다.

클린턴이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유리천장을 깨는’ 상징성의 정점이다. 이미 영국 총리(테러사 메이)를 비롯해 몇몇 나라의 최고지도자는 여성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구(IMF) 총재나 재닛 옐런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하지만 미 대통령에 여성이 오르는 것은 최고 자리에 여성 한 명을 보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클린턴의 패배는 남녀 임금격차 해소와 성평등 진척 속도가 주춤해질 수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의 패배가 아쉬운 이유다. 패배 인정 연설에서 한 그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언젠가 곧 누군가가 유리천장을 깨길 바란다.”

미 대선 투표가 한창이던 8일 밤 KBS가 방영했던 4부작 <해외걸작다큐-여성혁명, 그녀들의 이야기> 마지막편 ‘변화의 힘’을 봤다. 라가르드 총재, 사우디 첫 여성감독, 이란 첫 여성 카레이서, 브라질 원주민 첫 여성 변호사 등 남성 중심 세계에 맞서 쟁취한 여성들의 힘에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클린턴 패배에 낙담한 미국에서는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를 4년 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목소리가 일고 있다. 미국에서 여성 대통령 탄생은 생전에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남녀 임금이 같아지는 날은 볼 수 없다.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의 멜린다 게이츠 의장은 다큐에서 “여성이 수입의 90%를 가족에게 쓰면 파급효과는 가정을 넘어 지역과 국가에까지 미칠 정도로 중요하다”고 했다. 성평등의 첫단추가 남녀 임금격차를 없애는 일임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17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611151729571#csidx0284fc69c1524bb898ae6a236a8ef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