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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67]‘머리 둘 달린 인간’을 제거하는 방법(2016.11.29ㅣ주간경향 1203호)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을 조종하는 <뉴욕타임스>의 풍자 만평을 봤을 때 ‘머리 둘 달린 개’ 이야기가 떠올랐다. 1959년, 옛 소련 의사 블라디미르 데미호프는 작은 개 머리 부분을 잘라 큰 개 어깨에 접붙여 ‘괴물’을 만들었다. 작은 개는 큰 개의 심장에 의존해 살지만 괴물은 오래 살지 못했다. 나흘 만에 죽은 괴물은 박제가 돼 독일 박물관에 기증됐다. 데미호프는 장기이식 수술의 선구자였다. 머리 둘 달린 개 실험은 그 일환이었을 터이다. 실험 사진은 당시 <라이프>지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고, 실험 윤리 논란을 일으켰다. 데미호프는 인류의 장기이식 수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지만 대표적인 ‘배드 사이언티스트’라고 비판 받는다. <홍성욱의 STS, 과학을 경청하다>에서 이를 소개한 홍성욱 서울대 교수는 데미호프의 실험이 결국 ‘머리 둘 달린 인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머리 둘 달린 인간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다.

<뉴욕타임스> 만평과 머리 둘 달린 개는 불행하게도 현재 한국 현실과 맞물리면서 불온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최순실과 박 대통령이 머리 둘 달린 인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상상의 끝은 이렇다. 두 사람은 안 지 40년 가까이 됐지만 최순실이 박 대통령 머릿속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최순실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박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도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작은 개가 죽으면 큰 개도 죽는 법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상식을 초월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머지않아 막을 내릴 것으로 여겼다. ‘배반’의 캐릭터 박 대통령은 반전 드라마를 썼다. 절망에 빠진 국민은 딜레마 속에 갇혔다.

그 딜레마는 괴물과 맞닥뜨렸을 때 대처법이나 제거법을 잘 모른다는 사실에 있다. 예로부터 염치가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거나 반성하지 않는 사람을 괴물이라 불렀다. 그만큼 괴물이 현실에 많이 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괴물의 전형이다. 그의 주변에도 괴물투성이다. 그런데도 괴물을 제대로 제거하지 못한다. 이보다 지독한 역설과 딜레마가 있을까. 잘 알려진 영화와 소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우선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괴물>을 보자. 한강에 나타난 괴물에게 딸을 빼앗겼지만 괴물을 제거하는 일은 오롯이 주인공 가족의 몫이다. 말이 안 되는 설정이다. 괴물의 탄생 배경에는 가족을 뛰어넘는 다양한 구조적인 문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어떤가.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창조자가 자신으로부터 달아났기 때문이다.

봉 감독과 메리 셸리는 괴물 제거 방법을 직설적으로 던지지 않는다.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일 게다. 우리 스스로 찾으라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영화와 소설을 뒤집어서 보면 그 실마리가 보인다. 한강에 나타난 괴물과의 싸움은 주인공 가족만이 떠맡아야 할 일이 아니다. 국가와 국민 모두가 나서야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봉 감독은 괴물 탄생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또 다른 괴물이 나타날 수 있음을 영화 말미에 여운처럼 남겨놨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싫든 좋든 자신이 만든 괴물로부터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 프랑켄슈타인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괴물일지도 모르는 대통령과 맞서는 국민의 자세도 그러해야 한다. 혁명의 시작은 시민이 하고 마무리는 정치가 하는 게 순리라 해도 정치인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된다. 촛불 항쟁이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것만이 이 지긋지긋하고 비상식적인 상황을 끝내는 유일한 길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611221822351#csidxa0bf14813cc9066b93662cf265c7f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