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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23]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2015.12.29ㅣ주간경향 1157호) 살풍경한 2015년 세밑에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을 듣는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사랑과 순결이 넘쳐 흐르는 이 땅/ …/ 아 대한민국, 아아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아아 대한민국….” 나지막하면서도 단호한 정태춘의 목소리가 칼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1990년부터 25년간 듣고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노랫말 속의 풍경이 현재에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2015년 대한민국의 풍경은 25년 전 정태춘이 부른 노래 속의 대한민국과 결코 다르지 않다. 25년 전 대한민국은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과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 쫓겨난 힘없는 공순이들”로 넘쳤다.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 더보기
[편집실에서22]타이밍의 역풍(2015.12.22ㅣ주간경향 1156호) 미국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고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쉽게 말하면 “그 시간에 거기 있은 사람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피해자는 “재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고, 가해자는 면죄부를 받는다. 이 표현이 떠오른 것은 두 가지 일 때문이다. 하나는 가 95년 만에 처음으로 1면에 사설을 실었다는 뉴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테러방지법이다. ‘전염병 같은 총기 확산’이라는 제목의 지난 5일자 1면 사설은 총기규제에 무책임한 정치권과 무관심한 유권자들을 질타하며 규제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도덕적으로 분노할 일이며 국가의 치욕이다.” “총기 확산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더보기
[편집실에서21]두 딸 이야기(2015.12.15ㅣ주간경향 1155호) 두 딸이 있다. 한 명은 갓 태어났고, 한 명은 환갑을 훌쩍 넘겼다. 두 딸 모두 아버지가 유명하다는 점이 닮았다. 덕분에 갓난아기의 앞날은 창창하고, 다른 한 명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태평양 양편 다른 나라에서 태어난 것만큼 두 딸의 차이는 크다. 가장 큰 것은 두 딸을 바라보는 내 감정이다. 한 명에게서는 희망과 감동이, 다른 한 명에게서는 절망과 분노가 느껴진다. 갓난아기는 ‘금수저’를 입에 물고 세상에 나왔다.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출생 선물은 ‘통 큰 기부’였다. 기부액은 무려 약 52조원이나 된다. 그가 직접 받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자산의 99%를 일생 동안 기부하겠다고 온 세계에 약속했다. 선물에는 아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모든 부모의 마음이 담겨 .. 더보기
[편집실에서20]복면 벗기기(2015.12.08ㅣ주간경향 1154호) 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과 눈웃음 짓는 듯한 눈매, 그리고 양쪽 끝이 위로 치솟은 콧수염과 세로로 한 줄로 난 턱수염. 가만히 보면 전체적으로 상대방을 조롱하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이 얼굴의 주인공은 ‘가이 포크스’ 가면이다. 410년 전에 영국 국왕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실존 인물이다. 그 후 영국에서는 국왕의 무사와 암살음모 재발 방지를 위해 그의 상을 태우는 축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최근 ‘11·13 파리 테러’를 자행한 이슬람국가(IS)에 사이버 전쟁을 선포한 국제 해커집단 ‘어나니머스’ 덕분에 가이 포크스가 다시 유명세를 탔다. 가이 포크스가 축제 속 인물에서 현대적 의미로 되살아난 계기는 약 10년 전쯤 상영된 영화 덕분이다. 영화의 주인공 브이가 이 가면을 쓰면서 저항의 상징이 된 것이다. .. 더보기
[편집실에서19]무엇이 잘못됐을까(2015.12.01ㅣ주간경향 1153호 ) 어느 날 갑자기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들 배경에 청·백·적색의 프랑스 국기가 등장했다. 프랑스 국기는 페이스북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다. 프랑스 국기의 삼색은 각각 자유·평등·박애를 의미한다. 왕정 철폐와 시민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프랑스 혁명 정신이 담겨 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도 경기장과 의회 등에서 울려퍼졌다. 모두 ‘11·13 파리 테러’ 이후의 풍경들이다. 피로써 쟁취한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공격한 데 대한 분노이자, 희생자를 기리고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연대감의 표시다. 14년 전에도 그랬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가 알카에다의 여객기 테러로 공격당했을 때 전 세계인은 한마음으로 애도하고 연대를 표시했다. 14년이 지난 지금, .. 더보기
[편집실에서18]정치에 속고 자본에 털리고(2015.11.24ㅣ주간경향 1152호) 첫머리는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나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이 말한다. “선생께서는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는데, 분명히 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가 있겠지요?” 맹자가 답한다. “왕께서는 어찌 꼭 이로움을 말하십니까(王何必曰利). 오로지 어짊과 의로움이 있을 따름입니다(亦有仁義而已矣).” 맹자의 말은 이어진다. 요약하면 왕이 이익을 추구하면 대부와 백성들도 차례로 이익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이(利)는 사익이고, 의(義)는 공익이다. 군주는 힘에 의한 패도정치 대신 왕도정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게 맹자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안타깝게도 23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왕도정치가 아닌 패도정치가 판치는 시대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정치권을 보자. 청와대와 정부는 .. 더보기
[편집실에서17]0.1%가 99.9%를 깔보는 나라(2015.11.17ㅣ주간경향 1151호)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세력이 쏟아내고 있는 망발 가운데 파렴치의 극치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국정화 반대=비국민’ 발언을 해 검찰에 고발된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3일 대국민 담화에서 “(전체 학교의)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고 한 황교안 총리의 언급에 더 눈길이 간다. 황 총리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의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검정 교과서 체제가 다양성을 훼손한다는 근거로 과거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을 예로 들다가 예의 망발을 했다. “전국 2300여개 고등학교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고, 나머지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 교학사 교과서만 정상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이 말은 바꿔 말하면 0.1.. 더보기
[편집실에서16]하워드 진과 ‘국정화 매카시즘’(2015.11.10ㅣ주간경향 1150호) 를 쓴 진보역사학자 하워드 진(1922~2010)은 26년 전 진보잡지 에 ‘공산주의’에 대해 쓴 적이 있다. 1948년 미 하원의 ‘비미국인활동색출위원회’는 ‘당신이 공산주의에 대해 알아야 할 100가지’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배부했다. 이 위원회는 1938년에 나치 협력자 색출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는 공산주의자 색출로 변질돼 있었다. 팸플릿에는 100가지 질문과 답변이 기록돼 있었다. 진은 3개의 질문과 답을 예시한다. 예컨대 질문 76번은 이렇다. ‘일상생활 어디에서 공산주의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답은 ‘당신이 다니는 학교, 노조, 교회 또는 민간단체에서 찾아보면 된다’이다. 하워드 진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산주의는 기괴하지만 심각한 여파를 몰아온 이데올로기라는 점.. 더보기
[편집실에서15]‘드론 페이퍼’(2015.11.03ㅣ주간경향 1149호) 딴 나라 이야기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던 10월 15일, 어쩌면 역사적인 사건이 될지도 모를 문건을 한 미국 인터넷 언론이 폭로했다. ‘드론 페이퍼’. 미국이 무인비행기 드론을 활용해 벌이는 ‘드론 전쟁’에 관한 비밀 문건이다. 보도 언론은 라는 인터넷 매체다. 기억하는가. 2년여 전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국가안보국(NSA) 불법 대량 정보수집을 보도한 언론인 글렌 그린월드를. 어쨌든 가 ‘암살복합체’라는 이름으로 보도한 총 10건의 관련기사는 오바마 행정부 드론 전쟁의 민낯을 보여준다. 암살복합체라는 이름은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퇴임연설에서 경고한 ‘군산복합체’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드론 전쟁은 백악관, 중앙정보국(CIA), 국방부, 합동특수전사령부(JSOC) 등이 수행하고.. 더보기
[편집실에서14]지식인의 그릇된 자기확신(2015.10.27ㅣ주간경향 1148호) 에밀 졸라. 진정한 지식인을 말할 때 단골로 꼽히는 프랑스 작가다. 그는 19세기 말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해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로 국가 폭력에 맞섰다. 그 결과 그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지식인의 표상을 우리에게 심어줬다.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으로 조성된 갈등이 한국 지식인의 역할을 묻고 있다. 전국 역사학과 교수들의 국정교과서 필진 참여 거부 움직임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가운데 눈에 띄는 이가 있다. 국정교과서 편찬의 책임을 진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다. 역사학계의 원로이자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이기도 한 그는, 말하자면 제자들과 역사학계 후배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김 위원장으로 하여금 그런 평가를 받게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