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스타 앤젤리나 졸리의 감독 데뷔작 <피와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배경은 보스니아 전쟁(1992~95)이다. 전쟁 전 사랑에 빠진 무슬림 여성과 세르비아 남성이 전쟁 때 포로와 지휘관으로 만나는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를 그렸다. 지난 13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에서 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졸리는 시사회가 끝난 뒤 자신의 영화가 시리아 유혈사태를 막을 수 있는 국제사회의 ‘웨이크업 콜’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해온 졸리에게는 보스니아 전쟁의 악몽이 시리아 참상과 겹쳐졌을 법하다. 1년 가까이 진행된 정부군의 유혈진압으로 국민 5500여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홈스에서는 정부군의 무차별 포격이 이어지고 있다. 시민들은 죽음과 굶주림의 공포 속에서 연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제사회는 손을 놓고 있다. 이것이 졸리가 국제사회에 던진 경고다. 졸리의 심정은 시리아 참상을 지켜보는 여느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시리아 사태는 20년 전 보스니아 전쟁과 성격은 다르지만 닮은 점이 있다. 풀기 어렵다는 종교와 민족 문제가 연루된 갈등이라는 점이 그렇다. 보스니아 전쟁이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와 보스니아계(이슬람교)·크로아티아계(가톨릭) 간 갈등이라면 시리아 사태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 종파갈등 성격이 짙다. 대량학살이라는 점도 닮았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10만명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리아 사태는 보스니아 전쟁과 달리 지정학적 중요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보스니아는 유고연방의 작은 국가에 불과했다. 반면 시리아는 러시아, 이란 같은 강대국을 우방으로 둔 데다 전략적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국제사회가 군사개입을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보스니아 전쟁 당시 국제사회의 개입과정이 시리아 해법에 시사하는 바가 없진 않다. 유고연방이 구소련 붕괴 뒤 해체에 들어갈 때만 해도 국제사회는 불개입이 원칙이었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추진하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3인방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는 세르비아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는 인도주의적 위기에 빠졌다.
국제사회의 본격적인 개입이 시작됐다. 관련 유엔 안보리 결의안만 100개 이상 채택됐다. 첫 조치는 세르비아 민병대의 무장해제였다. 무슬림 보호를 위한 안전지대도 설치됐다. 유엔 평화유지군도 파견됐다. 그러나 이들에겐 자위를 위한 무력 행사라는 한계가 있었다. 그 결과 1995년 7월 무슬림 8000여명이 학살되는 스레브레니차 대참사를 낳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이 사건을 계기로 공군력을 투입하는 무력개입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켰다.
국제사회가 보스니아 전쟁에서 배운 값비싼 교훈은 군사개입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교훈을 시리아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인도주의적 개입은 무력개입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고 깊어가는 시리아의 인도주의적 위기를 마냥 지켜만 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미국 워싱턴근동정책연구소의 소네르 차이아프타이와 앤드루 태블러는 최근 ‘인도주의적 안전지대: 시리아를 위한 보스니아의 교훈’이라는 글에서 “시리아에 인도적 개입을 하려면 보스니아 전쟁의 교훈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제시하는 보스니아 전쟁의 교훈은 세 가지다. 군사시스템을 갖춘 안전지대 설치, 평화유지군에 폭넓은 무력 행사권 부여, 안전지대와 인도주의적 회랑 보호를 위한 공군력 사용이다.
24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는 ‘시리아의 친구들’ 회의가 열린다. 아랍연맹과 유럽 국가들이 주도하는 회의에서는 홈스처럼 고립된 지역을 ‘인도주의 회랑’으로 만들고, 터키 국경에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국제사회가 보여준 인도주의적 개입과정 그대로다. 과연 국제사회는 시리아 사태 종식을 위해 보스니아 전쟁에서 배운 교훈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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