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국제뉴스를 다루면서 2011년만큼 ‘격동의 해’라는 말을 실감해본 적이 없다. 새해 벽두부터 세밑까지 역사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워낙 큰 사건들이 많아 되돌아보는 데 숨이 막히고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다. 사건을 좇는 데만 급급해 세계사적인 변화의 큰 흐름을 제대로 읽고 짚어내지 못한 것이 아닌지 회한도 든다. 그럼에도 올 한 해의 의미를 정리하자면 ‘분노와 저항의 해’라고 부르고 싶다. 거리로 나선 수많은 사람의 분노와 저항은 인간정신과 시대정신의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시사주간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시위자(the protester)’를 선정한 데 공감한다. 특히 리처드 스텐절 타임 편집장이 선정 이유로 밝힌 글 가운데 “시위의 물결은 소셜네트워크보다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빚어낸 혁명이었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2011년 분노와 저항의 물꼬는 튀니지의 청년 노점상이 텄다. 지난해 12월17일 경찰의 단속에 항의해 분신한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1월4일 숨졌다. 부아지지의 분신과 죽음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을 낳은 세르비아 청년의 총성과 다름없었다. 누가 이 사건이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단초가 될 줄 알았을까. 부아지지의 분신을 계기로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아랍의 봄’ 시위가 시작됐다. 아랍의 봄은 서방의 지배나 이스라엘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다. 부패와 가난에 대한 반발이자 자유와 인간 존엄,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의 표출이었다. 울림은 컸다.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에서는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 운동으로, 미국에선 월가 점령 시위로 번졌다. 칠레에선 등록금 반대 투쟁으로, 이스라엘에선 생활고 불만 시위로, 모스크바에선 반푸틴 시위로 이어졌다. 이처럼 전 지구적으로 시민들이 무능한 리더십과 제도에 항의해 들고 일어난 적은 없다.
아랍의 봄은 일견 성공했다. 많은 독재자가 스러졌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죽음을 맞았다.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튀니지의 벤 알리, 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랍의 겨울’이었다. 이것이 아랍의 봄이 낳은 최대 역설이다. 아랍 민중이 서방의 지원을 받아온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서방은 강경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방은 혁명 후 아랍권이 민주주의와 이슬람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선택은 아랍인들의 몫이다. 서방이 혁명 후 들어설 이슬람 정권을 적으로 여길 경우 아랍의 봄의 성과는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17개국의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 유럽 지도자들은 지난 1년 동안 수없이 머리를 맞댔지만 결과물은 없다. 이 때문에 유럽 지도부가 1년 동안 유로존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인들의 놀음에 놀아났다는 시민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좌절이 커지고 불황의 수렁이 깊을수록 ‘어둠의 세력’도 커지기 마련이다. 극우주의자들이 유로존 위기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는 어느 누구도 바꿀 수 없다. 2011년 분노와 저항의 시위는 이미 역사를 바꾸고 있고 미래도 바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동시에 지금 요구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도 보여줬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리더십이요, 새로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다. 새 시대에 대한 기대는 세계를 불확실성에 빠뜨릴 수 있다. 2012년 국제정세도 안갯속이다. 미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대선이 치러진다. 중국에서는 지도부 교체가 이뤄진다. 현재로서는 이들 국가에서 선거혁명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한번 방향을 잡은 물줄기는 제 갈 길을 가는 법이다. 2011년에 심은 씨앗이 2012년에 어떤 열매를 맺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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