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3월21일 미국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역사적인 행진이 시작됐다. 흑인의 투표권 쟁취를 위한 ‘셀마~몽고메리 행진’이었다. 미 전역에서 참여한 8000여명은 나흘간 약 87㎞를 걸어 25일 목적지인 몽고메리의 주의회 앞에 도착했다. 이 행진은 두 차례의 좌절 끝에 성취한 것이라 의미가 각별했다. 3월7일 첫 행진은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릴 만큼 유혈이 낭자했다. 주 경찰은 셀마의 에드먼드 페티스 다리 위에서 행진하던 약 600명의 흑인을 향해 곤봉과 채찍 세례를 퍼부었다. 이 사건은 다음날 저명한 흑인 민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를 현장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으며, 역사는 바뀌었다. 킹 목사는 3월9일 1000여명을 이끌고 몽고메리로 향했다. 이들은 다시 주 경찰에 막혔다. 그리고 ‘피의 일요일’ 18일 뒤 몽고메리의 주의회 앞에 당당히 섰다.
지난 9일 월가 점령 시위대 일부가 역사적인 발길을 내디뎠다. 뉴욕 맨해튼의 리버티 스퀘어에서 수도 워싱턴까지 386㎞를 걷는 ‘뉴욕~워싱턴 행진’을 시작한 것이다. 오는 22일 워싱턴의 맥퍼슨 스퀘어에 도착할 때까지 행진을 통해 월가 금융인의 탐욕을 고발하고 새 체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행진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셀마~몽고메리 행진과 비교하는 것조차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불의와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항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진을 실시간으로 홈페이지를 통해 중계하고 있다. 지난 15일 새벽엔 월가 점령 시위의 진앙인 주코티 공원이 경찰에 유린되는 모습을 필라델피아에서 인터넷을 통해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리고 희망을 꺾으려는 공권력에 분노하며 다짐했다. “경찰의 행위가 역사상 가장 큰 실수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킹 목사도 흑인들이 처한 상황과 진실을 향한 집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흑인들에게 끊임없이 희망의 불을 지폈다. 그 결과 흑인민권운동은 결실을 맺었다. 셀마~몽고메리 행진을 마친 킹 목사는 앨라배마 주의회 의사당 계단에서 또 하나의 명연설을 했다. ‘우리는 계속 행진할 것이다.’ 킹 목사는 “그 어떤 것도 집념에 찬 사람들이 행진하면서 내디디는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진실은 계속 행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진을 했고, 앞으로도 계속 행진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비폭력을 강조했다. “우리의 목표는 결코 백인들을 이기거나 굴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우정과 이해를 얻어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그 자체로서 평화로운 사회, 양심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는 날은 백인의 날도 아니요, 흑인의 날도 아닐 것입니다. 그날은 인간다운 날이 될 것입니다.”
로이터 연합뉴스 | 경향신문DB
월가 점령 시위가 시작 두 달 만에 고비를 맞고 있다. 뉴욕 주코티 공원을 비롯한 미 곳곳의 점령지가 해산을 당했다.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 취리히의 동조 시위대 점령지도 강제 철거됐으며, 영국 런던 시위대 점령지도 철거 위협 속에 놓여 있다. 공공안전과 위생 등을 이유로 들고 있지만 1%의 본격적인 반격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월가 점령 시위대가 내세운 ‘1% 대 99%의 싸움’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현 체제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이는 1%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역사적인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1950~60년대 킹 목사가 그랬듯 온갖 억압과 박해도 비폭력 투쟁과 진실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 당시 주역인 히피들은 다수로부터 조롱당했지만 그들이 간 길이 옳은 방향이었음을 말이다. 월가 점령 시위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신념과 희망을 꺾지 않는 의지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만이 끝내 승리할 수 있다. 해서, 지금은 희망을 점령할 때다. helpcho65@kyunghyang.com
'이무기가 쓴 칼럼 > 마감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감후25/호르무즈 해협과 돌고래 (1) | 2012.01.19 |
---|---|
마감후24/역사를 바꾼 분노와 저항 (0) | 2011.12.22 |
마감후22/프랭클린 다시 읽기 (0) | 2011.10.13 |
마감후21/리비아의 친구들 (0) | 2011.09.08 |
마감후20/우리 안의 '브레이비크'들 (0) | 2011.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