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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아침을 열며

아침을열며16/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바르 비극

그날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까. 대참사 하루 전인 지난해 4월23일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외곽 사바르의 라나플라자. 8층짜리 이 건물엔 방글라데시 경제를 지탱하는 의류공장 5개가 입주해있었다. 일손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지 얼마 뒤 건물 기둥에서 3개의 금이 발견됐다. 시 당국이 건물을 진단한 결과 안전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건물 안 의류공장에 조업중단 명령이 떨어졌다. 노동자 수천명은 조기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몇 만원밖에 되지 않는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이들은 불안했다. 조업중단 기간이 길어지는 만큼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냥 조업재개만 기다릴 형편이 아니었다. 아직도 월급날은 10여일이나 남았다. 하지만 하루만 더 일하면 초과근무수당은 손에 쥘 수 있다. 생산공정에 쫓기는 공장 매니저들이 이를 모를 리 없었다.

4월24일, 비극의 날이 밝았다. 노동자들은 여느 때처럼 공장으로 나왔다. 일부는 건물이 붕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지만 매니저들의 협박에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조업 중 갑자기 정전이 찾아왔다. 워낙 잦은 일이라 평소처럼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며 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한쪽 기둥이 굉음을 내고 무너졌다. 건물은 침몰하는 배처럼 기울어졌다. 우려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공포에 질린 노동자들은 어둠을 뚫고 좁은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건물 안은 비명과 울부짖음이 난무하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불과 90초였다.

사망자 1134명, 부상자 2515명, 고아 약 800명을 낳은 대참사는 이렇게 일어났다. 사바르 비극은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는 허핑턴포스트 기고 글에서 “사바르 비극은 국가 실패의 상징”이라고 했다. 금이 간 국가시스템을 막지 못하면 국가가 붕괴의 더미 속에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2개층을 불법 증축한 것이 직접적인 참사의 원인이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 자본가의 탐욕 등 국가시스템의 붕괴가 빚은 결과였다.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 사고 현장에서 3일 만에 구조된 메리나가 지난 27일 사바르의 한 병원에 입원해 가족들의 위로를 받고 있다. 사바르 _ AP뉴시스

세계는 라나플라자 참사가 20세기 의류산업의 노동환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1911년 뉴욕 트라이앵글셔츠웨이스트 공장 화재사건처럼 21세기 노동환경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리라 기대했다. 146명의 목숨을 앗아간 뉴욕 화재사건을 계기로 노조 결성이 허용됐고, 작업장 안전은 향상됐다. 참사 후 방글라데시 노동자도 사업주 허가 없이 노조를 설립할 수 있게 됐고, 최저임금도 77%나 인상됐다. 방글라데시 진출 기업 150여곳은 화재 및 건물안전협약에 가입했다.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돕기 위한 기금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불법 하청계약 관행은 여전하다. 고조되던 패스트패션과 윤리적 소비에 대한 소비자들의 이해와 태도도 엷어지고 있다. 기금 모금액도 목표치인 4000만달러에 못미치는 1700만달러에 불과하다.

가슴 아픈 건 의류산업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방글라데시의 현실이다.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수출 규모는 연 200억달러에 이른다. 의류노동자 400만명과 가족 등 국민의 6분의 1인 2000만명의 생계가 걸려있다. “방글라데시를 위한 최선의 길은 H&M과 같은 브랜드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사바르 참사와 무관하지만 희생자 기금 설립에 앞장선 스웨덴 기업 H&M의 사회적 지속가능성 담당 매니저인 안나 게다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한 이 말 속에 방글라데시의 현실과 고민이 녹아있다. 이 나라 의류협회 및 정부 관계자, 도시개발업자는 말할 것 없이 국제노동운동가마저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라나플라자 생존자들도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같이 일하던 남편을 잃은 마흐무다는 지금도 3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의류공장에서 일한다. 매일 참사 현장을 지나가는 그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겁먹으면 어떻게 가족을 먹여살리죠? 건물 하나가 무너진 것이 모든 건물이 무너질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거라고 되뇝니다.” 자신을 의지하던 조원 20명 가운데 단 한 명만 살아남은 아픔을 겪은 샤플라도 마찬가지다. 죄책감에 시달린 그는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건설 현장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등을 다쳐 이마저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바르 비극 1주년이 세월호 침몰 참사와 겹치면서 흐르던 눈물마저 말라버렸다. 라나플라자와 세월호 참사는 이름만 다른, 같은 사건이다. 두 참사 뒤에는 정부의 무능과 안전불감증, 노동자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기업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개선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비극은 막을 수 없다.

조찬제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