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다.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주는 것을 사과해야겠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2016년 세밑. 책꽂이에서 고 리영희 선생(1929~2010)의 <우상(偶像)과 이성(理性)>을 꺼내 펼쳐본다. 1980년에 나온 증보 1판이다. 누렇게 색이 바랬다. 참회록 같은 서문이 한국 상황과 겹치면서 칼날이 돼 폐부에 꽂힌다.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진실을 알리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선생이 서문을 쓴 때는 유신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1977년 9월이었다. 그럼에도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펜으로써 언론통제와 반공 이데올로기에 맞서 우상 깨기에 전념해 온 선생은 결국 2년간 투옥됐다. 앞서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이 책으로 ‘반정부 의식화의 원흉’이 됐기 때문이다. 이 세 권의 책에는 금서라는 족쇄가 채워졌다. 하지만 당대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는 진실을 바라보게 하는 길잡이였다. 향후 민주화의 씨앗이 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선생은 2년여 뒤 나온 증보판 서문에 이렇게 썼다. “…글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또 새로운 독자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이 사회의 가면을 벗지 않은 많은 우상이 버티고 서 있다는 증거라 하겠다.” 초판과 증보판이 나온 사이에 10·26이 있었다. 박정희 체제가 몰락한 기쁨도 잠시, 선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우상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제 하늘을 덮었던 짙은 먹구름의 한 모서리가 뚫리고, 희미하게나마 밝은 햇빛이 내리비치기 시작했다.” 리영희 선생이 <우상과 이성> 증보판 서문에서 밝힌 박정희 정권의 몰락에 대한 소회다. 올해 촛불혁명은 박근혜 대통령을 청와대에 유폐시켰다. 박정희-박근혜 부녀 신화의 붕괴는 한 줄기 빛이다. 하지만 선생의 말처럼 깨뜨려야 할 우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낡은 우상은 깨뜨려야 한다. 낡은 우상이 더 이상 이성을 지배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2016년은 파사현정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해였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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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612191805271#csidx6c059a4297753f18ff300af1cc85e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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