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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72]‘최종 소비자’형 대선후보 원하나(2017.01.03ㅣ주간경향 1208호)

몇 달 전, 졸업논문이 리포트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한 글을 읽고 무릎을 친 적이 있다. 일본의 사상가이자 대학교수인 우치다 다쓰루(內田樹)가 해마다 졸업논문을 지도할 때 대학생들에게 들려준다는 내용이다.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이마, 2016)에 실린 글을 요약하면 이렇다. ‘논문과 리포트의 차이는 우선 읽을 대상에 있다. 리포트는 교수만 본다. 따라서 거짓을 쓰든, 읽지 않은 책을 읽은 것처럼 쓰든, 인터넷에서 글을 복사해 붙이든, 담당교수만 알아채지 못하면 된다. 반면 논문은 담당교수만 보는 게 아니다.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데이터가 잘못되거나, 인용 문헌의 제목이 틀리거나,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게 서술하면, 만에 하나 담당교수가 그냥 넘어갔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지적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논문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써야 하고, 논문을 쓸 때 여러분은 최종 소비자가 아니라 전달자라는 것이다.’

탁견이 아닐 수 없다. 내 경험이나 한국과 다른 일본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졸업논문의 재발견’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독자들’, ‘최종 소비자’와 ‘전달자’라는 개념이다. 2017년 대선주자들을 분석하는 데 유용할 것 같아서다. 주지하다시피 2017년 정유년은 ‘민주화 30년, IMF사태 20년, 보수정권 10년차’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해다. 무엇보다도 국운이 걸려 있는 대선의 해이기도 하다. 이번 대선은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에 따라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조기대선은 촛불혁명이 이뤄낸 성과를 완성 짓는 과정의 끝이다. 이미 정치시계는 조기대선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

우치다에 따르면 최종 소비자는 반지성주의자와 동의어다. 그는 최종 소비자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의 지적 능력을 향유하는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자신의 노력이 가져다주는 성과는 자기가 다 써버리겠다고, 누구에게도 그것을 나눠주지 않고 증여하지도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달리 말하면 반지성주의자는 자기 주장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근거가 없는 자료나 사례를 거리낌없이 내뱉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은 정치인으로 옮아간다. “위정자들의 정책의 옳고 그름은 오랜 시간 속에서 검증되는 법이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후에 자기들이 저지른 실정의 ‘빚’을 물려받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검증받을지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 사람들’은 앞의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독자들’이다. 즉 미래세대를 의미한다. 정리하면 우치다에게 최종 소비자는 미래세대의 운명이나 역사적 책임에 ‘나 몰라라’ 하는 정치인이다.

어찌 백가쟁명식 경연을 펼치고 있는 여야 대선주자들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겠는가. 모두가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지형에서 촛불민심을 앞세워 구애를 하고 있다. 야권의 유력 후보든 무임승차하려는 이들이든 민심의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무지와 왜곡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치다가 말하는 ‘최종 소비자’ 말이다. 그런가 하면 ‘지금 여기 나’보다 미래세대를 위해 고민하는 ‘전달자’가 되려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 대선은 ‘최종 소비자’와 ‘전달자’ 중 누구를 뽑을 것인가라는 질문이나 다름없다. 전달자의 심정으로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려는 후보를 뽑는 것이야말로 촛불혁명을 완성하는 일이다. 2017년, 우리는 다시 희망가를 부를 수 있을까.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612271523241#csidxca2e731f01fef7b94631535e740c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