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기 열흘 전쯤부터 불안한 내 마음을 달래준 이들이 있다. 정태춘과 안도현,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리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출퇴근버스 안에서 나는 정태춘의 노래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를 무한반복해 들었다.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사람이 없는 곳에서는 이 대목을 흥얼거리기도 했다. 덕수궁 돌담길 한쪽에 자리잡은 설치작품 ‘연탄재 위에 핀 꽃’을 보고는 안도현을 만났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는 그의 시구가 떠올라 가슴이 훈훈해졌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구 “확실성은 아름답지만 불확실성은 더욱 아름답다”는 고백컨대, 지인이 전해주기 전까지는 몰랐다. ‘첫눈에 빠진 사랑’이라는 시의 일부였다. 확실성과 불확실성이 교차하던 시기, 큰 위안이 됐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을 통해 만났다. 그동안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끝까지 읽지 못한 책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내 마음은 잔잔한 월든 호수처럼 평온해졌다. 탄핵 인용이냐 기각이냐의 절체절명의 시기에 네 사람을 만났기에 희망의 봄을 맞을 수 있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후폭풍은 가늠할 수 없다. 꽃샘추위처럼 우리를 괴롭힐지도 모른다. 선고 전의 개인적인 소회를 늘어놓은 것은 해소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불안감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배반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박근혜 없는 나라’다. 국민 80%의 바람이다. 박근혜는 지난해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로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가 됐지만 3월 10일 오전 11시21분 파면이 되면서 외형상 그 바람은 이뤄졌다. ‘박근혜 없는 나라’의 실체는 박근혜식 패악 정치의 트레이드 마크인 ‘배반’과 ‘비정상’과 ‘반칙’이 없는 나라일 터이다. 이를 완성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박 전 대통령 파면 후 들려오는 목소리는 두 줄기다. 하나는 탄핵정국으로 조성된 분열과 갈등을 치유하자는 목소리다. 당연한 말이다. 3월 10일 이후의 시간은 그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촛불과 태극기 세력을 분리하는 두 광장 사이의 차벽이나 지하철역 안내판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동안 광장과 거리에서 서로 등을 맞대온 사람들이 마주보고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정치권은 통합을 강조하지만 말로만 해결되는 사안은 결코 아니다. 그 역할을 오롯이 시민들에게 맡겨야 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될 때부터 숱하게 되뇌어온 말이다. 대통령 파면 이후에도 유효하다. 촛불혁명은 여전히 미완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물러났지만 그의 자기권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종세력이 20% 가까이나 된다. 이들이 통합을 말하면서도 반목과 질시를 조장하고 대결을 부추길 행동을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대통령 탄핵을 낳은 촛불혁명은 탄핵정국의 제2막을 열었을 뿐이다. 5월 9일 이전에 치러질 조기 대선은 촛불혁명 완수를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것은 적폐 청산과 국가 대개조라는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 기간은 대의명분보다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시기가 될 수도 있다. 촛불민심의 끈끈한 유대의 끈마저 지지 후보나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질 수밖에 없다. 탄핵정국 동안 분출된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역동적 에너지를 끝까지 모아야만 우리가 꿈꿔온 ‘박근혜 없는 나라’를 완성할 수 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다시 한 번 손을 맞잡아야 한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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