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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주간경향

미국 로비스트 ‘물 만난 고기’ (2009 10/27ㅣ위클리경향 847호)


 미국 상원 재무위원회에서 보건의료 개혁법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하루 전인 지난 10월12일 워싱턴 정가는 미국 의료보험 업계를 대표하는 최대 로비단체의 깜짝 보고서로 하루종일 술렁였다. 1300여 개 의료보험사의 권익옹호단체인 미국의료보험계획(AHIP)이 발표한 보고서는 의료보험 미가입자에 대한 벌금과 의보비용 인상률이 커질 것이라는 회색빛 전망이 핵심이다. 카렌 이그냐니 AHIP 회장은 “의보 가입 의무화를 어길 경우 벌금은 4인가족 기준으로 연간 최고 3800달러가 될 것이며, 앞으로 10년간 보험료 인상률이 18%에 이른다”고 밝혔다. AHIP 측은 다국적 회계컨설팅 업체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의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의료보험 업계 최대 로비단체인 미국의료보험계획(AHIP)의 카렌 이그냐니 회장이 10월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보건의료개혁 법안 상원 재무위안은 앞으로 10년 동안 보험료를 18% 인상할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AHIP 보고서는 상원 재무위의 보건의료 개혁 법안이 하루 뒤인 10월13일 찬성 14, 반대 9로 가결됨에 따라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보고서 발표 당일 언론들의 반응도 냉담했다.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AHIP 보고서가 너무 늦게 나와 영향력이 크지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의보 업계 관계자의 분노를 샀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AHIP가 상원 재무위안 표결 하루 전에 이를 비판하는 보고서를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추할 수는 있다.
 AHIP가 보고서를 발표하기 닷새 전인 10월7일 의회예산국(CBO)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하는 보건의료 개혁이 재정적자를 악화시킬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CBO는 이날 공개한 자료를 통해 상원 재무위에 계류 중인 법안대로라면 앞으로 10년동안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를 810억달러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CBO는 재정적자 감소효과는 2019년 이후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원 재무위 법안대로라면 앞으로 10년간 연방정부가 지출해야 할 보건의료 예산은 8290억달러로 추산되며, 10년 후 의보 수혜 대상은 현재 전 국민의 83%에서 94%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보건의료 개혁 문제로 곤경에 빠진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쾌재를 불렀음은 물론이다. 초당파적 기구로 공신력을 지닌 기구가 “단 한 푼이라도 적자를 낳을 수 있는 보건의료 개혁법안에는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바마의 입장을 지지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AHIP는 CBO 보고서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보고서를 발표했지만 결과는 무위에 그쳤다. 
 AHIP 사례는 올해 미국 정가의 최대 현안인 보건의료 개혁법안 처리를 앞두고 의보 업계의 로비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보건의료 체제 개혁을 둘러싼 로비전은 4반세기 만에 최대 현안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의 보건의료법 개정 때보다도 로비스트가 많다고 한다. 정부정책과 관련해 돈과 로비의 영향을 분석하는 단체인 책임정치센터(CRP)의 셰일라 크룸홀츠 사무총장은 “보건의료 개혁을 위한 싸움은 관련 기업, 관련 이익집단은 물론 미국민 개개인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면서 보건의료 개혁 법안을 둘러싼 로비 활동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6년 세제개편 이후 최대의 로비 활동이라고 말했다.
 CSM에 따르면 현재 보건의료 개혁 이슈와 관련해 등록된 로비스트는 약 3300명이다. 이는 CRP가 밝힌 의회에 등록된 전체 로비스트 1만2552명의 4분의 1이 넘는 숫자다. 전체 535명인 상·하원 의원 1명에게 6명씩 달라붙어 있는 셈이다. 블룸버그통신도 미국 상원의 기록을 토대로 보건의료 개혁과 관련해 등록된 로비스트는 3300명, 관련 기관은 1500개, 이들이 올해 상반기에만 로비 활동 자금으로 사용한 자금은 2억6340만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 로비 자금인 2억4140만달러보다 10%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려 있고, 돈이 되는 곳에 로비스트가 몰려든다는 속설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러나 워싱턴에서의 로비 활동은 로비스트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로펌이 전직 고위 행정부 관료들을 로비스트로 등록하지 않고 ‘특별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활용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정치적 대부로 통하는 톰 대슐 전 상원의원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오바마에 의해 보건의료 개혁을 진두지휘할 ‘보건 차르’에 임명됐지만 로비스트 전력 등으로 낙마했다. 아메리칸 대학의 의회 및 대통령연구센터의 제임스 서버 소장은 등록된 로비스트의 역할이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고 말한다. 서버에 따르면 지난해 의회에 등록된 로비스트 활동과 관련한 산업 규모는 34억달러다. 그러나 의회에 등록되지 않은 개인과 전략 고문 등을 포함할 경우 로비 산업의 규모는 약 3배인 96억달러로 늘어난다. 이를 감안하면 보건의료 개혁과 관련한 로비 뒤에도 수많은 미등록 로비스트가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맥스 바커스 미국 상원 재무위원장(왼쪽)이 10월13일 보건의료 개혁법안 재무위안이 가결된 뒤 공화당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진 올림피아 스노 의원(오른쪽)과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보건의료 체제 개혁을 둘러싼 치열한 로비는 대공황 이후의 최대 경제 위기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로비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짐에 따라 로비 산업이 전반적으로 위축됐음에도 성황 중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올해 1분기 워싱턴 주재 대형 로비기업의 수익은 전년 동기에 비해 10% 이상 줄었다. 주택건설, 국방, 교통산업 관련 로비 업계는 대규모 감원을 실시했다. 의회에 등록된 1만2552명의 로비스트 숫자는 지난해에 비해 2248명이 줄어든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하면서 재임 기간에 행정부 임명직 공무원이 퇴임한 뒤 로비 업체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정책 입안과 관련된 일을 하는 공무원에게 전 고용주나 이해관계자와 2년 동안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 로비 규제를 강화했다. 로비단체 ‘디모크러시 21’을 이끄는 프레드 워트하이머는 CSM에 “오바마 행정부는 전례 없는 규정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로비 규제는 로비단체의 항의에 밀려 완화될 수밖에 없었지만 로비 활동은 수그러들었다. AP통신에 따르면 7870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법안에는 총 8건, 74억달러의 경기부양책을 다루는 국방부의 경우 올들어 단 1건의 로비 활동만 각각 보고됐다.
 1912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 국민 의료보험 혜택을 공약으로 제시한 이후 100년 가까이 보편적인 의보 제도 도입을 위한 노력이 계속됐지만 관련 업계의 로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상원 재무위안이 통과됨으로써 보건의료 개협법안 논의는 막바지 단계에 다다랐다. 상원 재무위안과 이미 통과된 하원안 및 상원 보건·교육·노동·연금위안을 두고 최종안을 만들어 본회의를 통과하면 미국은 새로운 보건의료 체제를 갖게 된다. 최종 법안 통과와 저지를 둘러싼 의보업계의 로비활동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것은 불문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