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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경향신문 사설

[사설]세계로 확산되는 성추행 고발 운동이 의미하는 것(171115)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으로 촉발된 성추행·성폭행 고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이 한 달이 됐다. 그동안 유명 영화배우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참여로 연예계뿐만 아니라 스포츠계, 정계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하고 있는 성추행의 추악한 실체가 드러났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는 정치권으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내달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를 치르는 미 앨라배마주에서는 공화당 후보의 과거 성추문 사건이 드러나 공화당에 비상이 걸렸다. 공화당 지도부가 후보 사퇴까지 고려하고 있을 정도로 핫이슈가 됐다. 1989~1993년 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의 성추행 고발은 벌써 6번째다.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부시가 사진 찍을 때 엉덩이를 더듬었다고 밝혔다. 영국에서는 국방장관 등 각료들이 잇단 성추문으로 연쇄 사임했으며, 보수당과 노동당 의원 10여명도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테레사 메이 총리는 집권 보수당 강경파의 불신임 움직임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에서도 한샘과 현대카드 성폭행 사건이 폭로되는 등 폭발적인 참여가 이어지고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미투 캠페인이 없었다면 밝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성추행은 일터와 학교, 가정, 거리 어느 곳에서나 상시적으로 일어나지만 남의 일로 치부한 게 사실이다. 여성 활동가들이 피해자들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해도 묵살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기 일쑤였다. 가해자 대부분이 힘있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의 치욕과 분노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비록 미투 캠페인 덕분에 많은 피해자들이 고발에 동참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불이익이 두려워 신고조차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더 이상 성추문 문제를 피해자들의 용기에만 기대서는 안된다. 여성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모처럼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고발 운동을 성추행 문화를 뿌리 뽑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때마침 정부는 직장 내 성희롱 부실조치 사업주에게 징역형까지 가능케 하는 근절 대책을 내놨다. 대책이 아무리 좋아도 뿌리 깊은 남성 지배 문화의 변화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고위직 진출 기회를 늘리는 것도 필요하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남성들의 자성도 요구된다. 영국 국방장관은 사임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군이 기대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과거에는 용인됐지만 지금은 용인될 수 없다면 그동안의 행동방식이나 관행은 과감히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