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세계여성의날(3월8일) 때 일이다. 여성의 지위와 권리 향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 울려퍼질 때 미국에서는 한 성전환 여성이 투옥됐다. 그는 한때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전쟁일지와 국무부 기밀문서를 언론에 공개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유명인사였다. 바로 첼시 매닝이다. 그 일로 매닝은 35년형을 선고받았다. 7년반 넘게 투옥된 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퇴임 이틀 전 감형돼 4개월 후 석방됐다. 자유의 몸이 된 지 1년11개월 만의 재투옥이지만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 대다수의 언론과 시민들이 침묵한 탓이다. 투옥 죄목은 법정모독. 그는 자신의 자료를 공개한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조사차 제4연방항소법원 대배심에 출석했다. 그는 증언을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대배심이 비밀로 진행된다는 점, 이미 군사법정에서 모든 것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하루 22시간씩 28일간 독방에서 지내온 매닝은 지난 4일 일반 감방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가 증언하지 않으면 대배심 절차를 마칠 때까지 최대 18개월간 투옥될 수 있다.
미 정부가 이미 충분히 죗값을 치른 그를 다시 옭아매려는 이유는 뻔하다. 그를 압박해 어산지를 사법처리하기 위함이다. 두 사람은 미 정부에 눈엣가시나 다름없다. 그럴 만도 했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기밀자료는 미국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 덕분에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구실로 해외에서 벌여온 활동의 민낯이 드러났다. 많은 미국인들은 미군의 교전수칙이 망가지고, 그들도 민간인 학살의 공범이 된 사실을 깨달았다. 미 정부가 두 사람을 국가안보에 심대한 위협을 가한 범법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당연했다.
미국의 바람이 통한 걸까. 어산지는 11일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영국 주재 대사관에서 그를 보호해온 에콰도르 정부가 보호 조치를 철회했기 때문이다. 어산지가 망명한 지 6년10개월 만이자 위키리크스가 트위터에 “어산지가 몇 시간에서 며칠 안에 추방될 것”이라는 글을 올려 우려를 표현한 지 일주일 만이다. 망명 지위 철회 이유는 국제협약 위반이다. 전임 좌파 대통령 시절 망명한 어산지는 현 레닌 모레노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갈등을 빚어왔다. 모레노는 최근에도 대통령이 되기 전 자신과 가족의 계좌나 전화 같은 사적 정보를 유포한 어산지를 비난한 바 있다. 어산지의 체포로 그의 미국 송환과 투옥은 시간문제가 됐다. 미 정부는 이미 그를 이적행위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매닝과 어산지는 미 정부의 주장처럼 국가안보의 위협일까. 물론 아니다. 오히려 언론 자유와 시민의 알권리 수호자라 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찬사를 보낸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최근 언론의 태도는 그때와는 딴판이다. 사실 보도만 할 뿐 이들을 옹호하거나 이들의 투옥이 언론 자유의 중대한 침해라는 목소리를 담은 사설이나 칼럼은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초선인 민주당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이 지난 2일 매닝 석방을 요구한 것이 고작이다. 오히려 민주당은 어산지의 투옥을 바라는 눈치다.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위키리크스가 민주당 대선본부장의 e메일을 공개하는 바람에 패배했다는 악감정이 남아서일까. 침묵 지키기는 여성운동단체나 인권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미 정부는 언론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 위배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또 같은 내용을 공개한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제쳐놓고 어산지만 사법처리하려는 것이다. 만약 어산지에 대한 관심이 옛날과 같았다면 그는 쉽게 체포되지 않았을 터이다. 오로지 양심에 따른 행동으로 국가 권력의 오만함과 언론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이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장자연 사건’과 ‘김학의 성범죄 의혹 사건’에 대한 재수사가 한창이다. 장자연은 권력의 희생자를, 김학의는 권력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윤지오나 피해여성의 용감한 증언이 없었다면 재수사는 불가능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침묵하던 많은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매닝과 어산지, 윤지오와 피해여성은 국가나 권력 앞에 무기력한 개인을 대표한다. 이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배반의 침묵을 깨는 양심의 목소리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시민과 약자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을 견제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되기 정확히 1년 전인 1967년 4월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한 반전 연설에서 강조한 말이다. 시민이 깨어 있지 않는다면 언론 자유는 물론 인권,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협에 빠질 수 있다. 지금이 그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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