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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기사/경향신문 사설

[사설] '징용배상 해결' 방한 조건 내건 스가, 아베와 다를 게 뭔가(201014)

일본 정부가 지난달 하순 강제징용 배상 소송의 피고인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자산 매각 문제가 중단되지 않으면 연말 서울에서 개최를 추진 중인 한·중·일 정상회의에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한국 측에 전달했다고 교도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스가 총리는 취임 이후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처음 통화한 뒤 일본 언론에 “한국에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대응이 3국 정상회의 연계로 현실화한 것이다.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이 이달 초 독일 베를린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독일 정부에 요청한 데 이은 또 다른 도발이다. 스가 총리 취임이 한·일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처사여서 여간 실망스럽지 않다.

일본의 요구는 사실상 징용배상 해결을 위해 한국 내에서 진행 중인 사법적 절차에 행정부가 개입하라는 것이다. 타국에 삼권분립 위반을 강요하는 명백한 억지 주장이다. 한국 정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던진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정상회담을 협상 카드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원칙과도 배치된다. 과거 일본 정부는 “(정상이) 만난다거나 만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를 협상카드로 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2008년 시작된 한·중·일 정상회의는 그동안 여러 곡절을 겪으면서도 동북아 3국 정상이 정례적으로 만나 상호 우호 증진과 현안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회의체에 부당한 조건을 내걸어 불참하겠다고 한 것은 졸렬한 처사이다.

 

더구나 일본은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 주도로 지난달 말 베를린에 설치한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해줄 것을 요청해 논란을 일으켰다. 모테기 외무상이 지난 1일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과 화상통화하면서 이를 언급했고, 이에 해당 지자체가 철거를 요구해 설치 3주 만에 철거 위기에 처해 있다. 일본이 해외에서 소녀상 설치를 반대한 게 처음은 아니지만 정부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서는 것은 지나치다.

 

강제징용 배상 및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입장차가 크다. 문 대통령이 스가 총리에게 강제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할 최적의 해법을 찾아나가자”고 했듯이 양국 외교당국 간, 특히 정상 간 대화로 풀어야 하는 지난한 과제이다. 스가 총리가 취임한 지 한 달이 다 돼 가도록 위안부 및 강제징용 문제 등 한·일 현안에 대해 강경 기조로 나간다면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스가 총리가 진실로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고자 한다면 한·중·일 정상회의 참석 등에 전향적 태도로 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