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인터레그넘.’ 3일 치러진 미국 대선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데 이보다 적절한 말은 없을 듯하다. 인터레그넘(interregnum)은 ‘정권과 정권 사이’라는 의미다. 역사적으로는 왕이나 교황 등 최고지도자가 없던 기간을 일컫는다. 미국에서는 대선일과 대통령 취임일(1월20일)까지 기간을 말한다. 통상 권력이양이 이뤄진다. 보통 11주 정도 되는데, 이번엔 79일이다. 올해 대선일 밤 풍경은 여느 때와 사뭇 다르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모두 ‘승복’ 대신 ‘승리’를 주장했다. 심지어 트럼프는 우편투표가 사기라는 주장을 펴며 대법원 소송을 공언했다. 박빙의 승부 탓이긴 하지만 패배 시 대선 불복 가능성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승자 미확정에 따른 ‘선거 사기 의혹 제기-재검표 요구 및 소송전-폭력사태’라는 혼돈의 인터레그넘 상황이 상당 기간 이어질 수도 있다. 대선 불복에 따른 혼돈의 인터레그넘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다. 향후 예측할 수 있는 인터레그넘의 전개 방향은 크게 세 가지다. 고어의 길, 후버의 길 그리고 제3의 길이다.
2000년 대선은 초박빙이었다. 민주당 앨 고어와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 모두 대선 이튿날 아침까지도 선거인단 과반(270명)을 확보하지 못했다. 부시와 고어가 확보한 선거인단은 각각 246명과 250명이었다. 승패의 관건은 선거인단 25명이 걸린 플로리다주였다. 언론들의 예측은 밤새 엎치락뒤치락했다. 승자도 계속 바뀌었다. 두 후보 간 표차가 2000표 이내로 좁혀지면서 결국 재검표가 선언됐다. 재검표 결과 부시가 537표 차로 승리했다. 처음에 패배를 시인했던 고어는 이를 철회하고, 연방대법원 결정이 나올 때까지 싸우기로 했다. 12월12일 대법원은 5 대 4로 재검표 중단 결정을 내렸다. 당시 고어는 계속 싸워갈 헌법적 수단도 있었고, 몇몇 고문들은 그렇게 하길 강력히 권고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재검표 논란을 의회로 가져갔다면 현직 부통령이자 상원의장으로서 충분한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어는 대법원 결정 다음날 “결과를 수용한다”면서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비록 불가피한 재검표 논란으로 권력이양 기간 75일 중 절반 가까운 36일을 허비했지만 고어의 승복으로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1932년 대선은 다른 의미의 혼란을 보여줬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해 재선에 실패했다. 후버는 당연히 선거 결과에 승복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주식시장 붕괴에 따른 대공황 상황임에도 후버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특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갈 길 먼 루스벨트의 발목을 잡는 데 혈안이었다. 루스벨트의 최대 공약인 ‘뉴딜’ 정책이 미 경제 기반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실행조치를 막았다. 이미 실패한 정책을 밀고 나가기도 했다. 그의 방해공작은 취임 전날까지도 이어졌다. 이 때문에 매년 3월4일이던 대통령 취임일이 1월20일로 앞당겨지게 됐다. 후버의 모습은 결코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이 할 행동이 아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대통령이 후버처럼 헌법적 권한을 활용한다면 합법적인 권력이양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질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도 큰 위협이다.
대선 전만 해도 대선 후 혼란상은 트럼프의 몫으로 여겨졌다. 그가 내놓은 트윗 메시지나 성명, 그가 보인 행동 때문이다. 하지만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서로가 ‘도둑맞은 선거’라고 주장하는 판국이 됐다.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바이든이 패배할 경우 승복하는 전통을 감안하면 고어의 길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패배할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어의 길도, 후버의 길도, 둘을 합친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있다. 바로 트럼프의 길이다. 트럼프의 공언이 현실화할 경우 20년 전 일시적 헌정 중단이라는 악몽보다 더 심각한 혼돈이 빚어질 수 있다. 실제로 ‘백악관 두 대통령’ 전망까지 나온다. 트럼프의 길은 역사에 또 하나의 오명이 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불확실성의 심연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미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대선 불복에 얼룩진 정치 후진국이 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종주국으로 남을 것인가. 승자 미확정에 따른 불확실성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20년 전처럼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혼돈의 인터레그넘이 짧을수록 불확실성이 제거되는 속도는 빨라진다. 이는 패배자가 얼마나 빨리 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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