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애틀랜타 일대에서 20대 백인 남성의 연쇄 총격으로 한국계 여성 4명을 포함해 8명이 사망했다. 범죄의 성격을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지만, 희생자 중 6명이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점에서 특정 인종과 젠더를 겨냥한 인종차별적 혐오범죄일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아시아계를 겨냥한 혐오범죄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한국인이 대거 희생된 참극이 일어나 우려를 더하고 있다.
용의자가 페이스북에 중국에 대한 반감을 담은 글을 남긴 것을 보면 이번 사건은 혐오범죄일 가능성이 높다. 현지 언론과 정치권도 혐오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명했다. 그런데 현지 경찰은 초동수사 결과 용의자가 성중독 유혹을 제거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며 혐오범죄 가능성을 축소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용의자가 성중독증에 빠졌을 수도 있고, 혐오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섣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사건 초기부터 성중독을 강조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현지 유력 언론들도 경찰의 조사 방침을 이해할 수 없다며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 수사 담당 경찰의 대변인이 인종주의자라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인종범죄가 부각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수사당국은 한 점 의혹이 남지 않게 범행 동기를 밝혀야 한다.
이번 참사가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에서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공격은 있었다. 이달 초 뉴욕에서는 80대 한국계 여성이 묻지마 폭행을 당해 의식을 잃는 일이 있었다. 한 이민자 옹호단체의 조사를 보면 지난해 3월부터 1년간 접수된 혐오·차별 신고 건수는 3800건으로, 예년에 비해 40배 가까이 급증했다. 올해 들어서도 두 달 동안 500여건이 접수됐다. 취임 전부터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하고 코로나19가 발생하자 ‘중국 바이러스’로 부르며 혐오·증오를 부추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탓이 크다. 문제는 미국 사회가 인종차별주의적 공격에 무방비 상태라는 점이다. 오히려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적 불안과 의회 의사당 점거 사태 등에서 보듯 악화할 요인이 넘쳐난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인종 정의를 4대 국정과제에 포함하는 등 심각한 현안으로 인식하고 있다. 미 정치권은 혐오범죄를 규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이번 사건이 미국 내 인종주의를 되돌아보고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조치들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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