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연장 등의 보상조치 없이 임금피크제를 시행하는 것은 연령에 따른 차별에 해당돼 위법하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26일 A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B연구기관을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가 문제삼은 것은 자신이 임금피크제 도입 전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 임금만 깎였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이유로 한 임금피크제는 현행 고령자고용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임금이 삭감되는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정년 연장 같은 보상조치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는 취지다.
이번 판결은 대법원이 그동안 사업장별로 적용되는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엇갈렸던 하급심 판결에 처음으로 명확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효력 인정 기준으로 4가지를 제시했다.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들이 입는 불이익의 정도, 임금 삭감에 대한 대상 조치의 도입 여부 및 그 적정성,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의 본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었는지 등이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고는 특정 연령에 도달하고 노사가 합의했더라도 임금피크제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앞으로 임금피크제 개별 사례와 관련한 법원의 판단은 임금 삭감에 걸맞게 업무량 또는 업무강도 저감 등이 있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판결의 적용 대상은 ‘60세 정년’ 도입 전에 이미 정년이 60세 이상이었던 공공기관의 임금피크제 대상 노동자들이다. 공공기관들은 2015년 5월 정부의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권고안에 따라 고령자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임금을 줄이는 정년보장형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기존 정년은 연장하지 않되 정년을 3~5년 앞두고 임금피크제를 실시하는 것이 핵심이다. 임금이 깎일 게 뻔했지만 도입 성과를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노사합의를 통해 채택한 방식이다. 그 결과 임금피크제가 인건비 축소와 고령 노동자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인건비 절감에 따른 청년 일자리 창출 효과도 미미했다.
이 판결에 따라 기업의 인건비 부담 완화 목적으로 일정 연령 이상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에는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임금피크제의 손질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한국노총은 대법 판결에 “임금피크제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청년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는 미미했고 노동자의 임금만 삭감됐다”면서 환영했다. 하지만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임금피크제의 본질과 법의 취지 및 산업계에 미칠 영향 등을 도외시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임금피크제를 둘러싼 갈등이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노사는 이번 판결의 취지에 맞게 임금피크제 적용 시 고령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는 데 적극 노력해야 한다. 경영계는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삭감된 인건비를 신규 고용에 적극 활용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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