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50년간 여성의 낙태권(임신중단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난 24일(현지시간) 공식 폐기했다. 이에 따라 낙태권은 더 이상 연방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됐으며, 낙태권의 존폐 결정은 주 정부와 의회의 손에 넘어가게 됐다. 이번 결정은 그동안 여성의 인권을 확대시켜온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판결로 유감을 표한다.
미 연방대법원이 낙태권을 폐기한 논리는 “임신중단 권리는 헌법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고, 미국의 역사와 전통, 자유의 개념에 내재된 권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헌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헌법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고, 헌법 제정 이후 달라진 상황이나 인권 의식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건강권 확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낙태권은 이미 기본권으로 간주되고 있어 주 정부 및 의회가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아닐뿐더러, 임신을 한 모든 여성에게 관련된 낙태 규정이 미국 내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판례를 뒤집은 것은 연방대법원의 보수 대법관 우위(6 대 3)의 결과다. 일부 대법관은 청문회 때 판결을 지키기로 한 당초 약속을 뒤집었다.
미국의 절반에 가까운 주가 낙태를 사실상 금지하는 조치를 할 것으로 보여 혼란이 불가피하다. 상당수 주는 임신부의 생명 위협만 낙태 사유로 인정하고 근친상간·강간 임신도 낙태 금지 대상으로 규정한다. 이 때문에 불법 시술과 원정 낙태가 횡행할 수 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보수적인 연방대법원이 피임, 동성혼, 동성 성관계를 인정한 판례를 뒤집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낙태권이 보편적 기본권이라는 인식은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 25년간 임신중지가 법적 권리 지위를 획득한 나라는 50여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 등 우방국 지도자들이 한목소리로 연방대법원 결정을 비판한 것은 당연하다.
이번 판결이 뒤집힌 이유 중 하나로 미국 정치권의 직무태만이 지적된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50년이 흐르는 동안 정치권이 낙태권을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임신중단을 한 여성과 의료인을 처벌하도록 한 형법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정부는 최장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는 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국회의 보완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여성들이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 서비스와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회는 조속히 입법에 나서야 한다.
'이무기가 쓴 기사 > 경향신문 사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 고물가 행진 속 실질임금도 못 지킨 최저임금 인상(220701) (0) | 2022.06.30 |
---|---|
[사설] 중국 ‘구조적 도전’으로 명시한 나토, 더 복잡해진 한국 외교(220630) (0) | 2022.06.30 |
[사설] 중대재해법 개정한다는 여권, 산재공화국 오명 잊었나(220618) (0) | 2022.06.17 |
[사설] 봉합한 화물연대 파업, 안전운임제 강화로 근본 해결해야(220616) (0) | 2022.06.15 |
[사설] ILO의 ‘안전·건강한 노동환경’ 기본권 채택과 정부의 역할(220613) (0) | 2022.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