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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69]촛불 앞의 ‘11·29 반동’(2016.12.13ㅣ주간경향 1205호)

‘신의 한 수’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꼼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내심 ‘두고 보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법도 하다. 이런 속내를 감추기 어려웠던가 보다.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야당에 약 올리는 허튼소리가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시쳇말로 약이 좀 오를 수 있다.”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럼 어때. 어쨌거나 불가능하다고 여긴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수 있는 전략임에는 틀림없으니까. 역풍이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지. 중요한 건 탄핵 대오를 뒤흔들고 시간을 버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니까. 또 바람이 불면 언젠가 촛불이 꺼질지 누가 알랴.

‘단계적 퇴진’을 밝힌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와 이틀 뒤 나온 ‘4월 퇴진·6월 대선’이라는 새누리당의 퇴진 로드맵 이후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퇴진 로드맵 전략은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닥치고 탄핵!’이라는 야당의 탄핵 대오는 흐트러졌다. 분열 직전의 새누리당은 한데 뭉쳤다. 앞날을 낙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도 ‘신의 한 수’임에는 틀림없다. 어쩌면 이들은 프랑스혁명의 종말을 고한 기득권 세력들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처럼 뜨거운 촛불민심에 찬물을 끼얹는 ‘11·29 반동’이 될 것이라며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정국의 시계를 한 달 전으로 되돌렸다는 점이다. 돌고돌아 다시 ‘꼭두각시 정권’이라니. 최순실은 구속됐지만 누군가가 여전히 박 대통령을 데리고 꼭두각시 놀음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울화통 터질 만하고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누가 조종하는 걸까. 아마도 새누리당의 핵심 친박이나 박 대통령의 보이지 않는 참모가 아닐까 싶다. 좀 더 확대하면 박 대통령의 퇴진을 불리하다고 여기는 모든 기득권 세력일 게다. 이들은 웃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국민을 상대로 얕은 수를 쓰다 발가벗겨지는 수모를 당했으니까. 사실 새누리당은 이번 농간으로 국정농단의 주체가 최순실이 아니라 자신들임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친박과 비박이 초록동색임도 밝혀졌다. 더 이상 비박의 꾐이 통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다. 시쳇말로 새누리당은 박근혜의 친목계 조직이나 다름없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내 편 네 편’ 갈라치는 것도 계주와 너무나 닮았다. 다른 하나는 새누리당이 민심을 잘못 읽었다는 점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은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지점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국가가 누군가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이다. 새누리당은 국가를 자신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 퇴진과 그 이후에 이득을 보려는 다른 세력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앞세워 자신들의 특권을 방어하거나 강화하려는 시도는 결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음을 역사가 보여줬다. 지금의 국면도 그렇다. 촛불민심의 열망을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에게 촛불이 길을 밝혀줄 리 없다.

3차 담화 이후 정국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될 것인지, 아니면 ‘3일천하’로 끝날지 알 수는 없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새누리당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던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혼란은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이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국가의 미래가 달려 있다. 국가를 자신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거기에 야합하는 기득권 세력에 절대로 국가운영의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된다. ‘11·29 반동’은 성공할까. 아니면 새누리당의 명을 재촉하는 시한폭탄이 될까. 촛불민심만이 알 것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1612061852121#csidx57d3c00f77905829d2a99b23b38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