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9일(현지시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던 밀항선이 지중해에 침몰해 800여명이 사망했다. ‘최악의 인도주의적 참사’의 희생자는 가난과 폭력의 땅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서 희망의 땅 유럽으로 가려던 난민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목숨을 건 항해에서 최후의 순간까지도 ‘세월호의 아이들’처럼 버림받았다. 밀항선 선원들이 자신들만 살기 위해 이들을 죽음의 바다 속에 내버려뒀던 것이다. 방글라데시인 생존자는 이탈리아 ANSA 통신에 “밀항선 선원들은 사고 당시 문을 잠그고 사람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전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 주류 언론들은 이번 참사를 다루며 난민들의 ‘죽음의 항해’ 원인을 빈곤과 폭력사태에 있다고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지중해 비극의 모태는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의 몰락이 한몫했으며, 카다피 몰락의 비극은 미국이 잉태했다는 분석도 잇따랐다. 도대체 지중해 난민 참사와 카다피의 몰락, 그리고 미국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탈리아 가톨릭 단체 활동가들이 지난 4월 22일 로마의 한 공동묘지에서 사흘 전 리비아에서 밀항선을 타고 자국으로 오다가 지중해에서 숨진 난민 800여명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 AFP연합뉴스
카다피 사망 이후 난민 사태 통제불능
“유럽은 내일 더 이상 백인과 기독교인들의 유럽이 아닐 수 있다. 굶주리고 무지한 수백만명의 흑인들이 몰려들면 어떻게 대응할지… 우리는 과거처럼 미개인이 침입(게르만 민족 대이동)하면 유럽이 통합된 선진국 지위를 유지할지, 아니면 완전히 파괴될지 알 수 없다.” 카다피는 2010년 8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당시 총리를 만나 자신의 도움이 없으면 유럽이 ‘흑인들 천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했다. 리비아 국경을 봉쇄할 테니 그 대가로 연간 50억 유로(나중에는 5000만 유로로 경감)를 달라는 것이었다. 미 언론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지난 4월 21일 이 같은 두 사람의 비화를 전하면서 이번 지중해 난민 참사 배경에 카다피의 몰락이 부분적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CSM에 따르면 난민들의 밀항에 골머리를 앓아온 유럽 각국은 카다피가 죽기 1년 전인 2010년까지 리비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서둘렀다. 리비아 내 원유 확보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난민들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유럽 각국의 난민 경계령을 잘 이해하고 있는 카다피는 관계 정상화와 자신의 지위 구축을 목적으로 2004년부터 유럽 각국과 난민 통제를 위한 협의를 해온 터였다. 카다피와 베를루스코니가 만난 이후 리비아 해안에는 감시탑과 난민수용소가 세워졌다. 이탈리아로 가는 불법난민의 수도 전년보다 75% 이상 줄어들었다.
하지만 1년 뒤 반정부 시위로 카다피가 사망하고 정권이 몰락하면서 난민사태는 통제불능 상태에 빠졌다. 리비아 전역에서 이슬람 무장세력 간 내전이 벌어졌고, 여행은 어느 때보다 더 위험하게 됐다. 무법천지 상황은 리비아를 다시 한 번 유럽으로 가는 불법이민의 주요 통로로, 밀항을 돈벌이로 활용하려는 무장세력이 활개를 치는 곳으로 만들었다. 결국 카다피의 몰락이 그동안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던 난민 위기를 심화시킨 것이다. 가히 ‘카다피 죽음의 역설’이라 할 만한다.
미국의 인터넷 독립언론 컨소시엄뉴스는 4월 21일 이번 참사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카다피의 몰락을 초래한 2011년 리비아 사태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미국이 리비아 군사개입을 위해 내세운 논리는 카다피 정권의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민보호책임(R2P·Responsibility to Protect)’이라는 새 개념을 적용했다. 이는 그동안 미국이 국제분쟁 개입의 명분으로 내걸어온 인도주의적 목적이라는 범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같은 논리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과 서맨사 파워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현 유엔 주재 미대사)과 같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내의 R2P 지지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리비아 군사작전의 목표는 당초 민간인 학살 방지였으나 카다피를 제거하는 ‘정권교체’로 바뀌었다. 컨소시엄뉴스를 운영하는 언론인 로버트 패리는 이를 ‘리비아 전쟁 집단사고(Group Think)’로 설명했다. 집단사고는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만 소통한 결과 그 의견이 전부인 것처럼 판단하는 오류를 말한다. 말하자면 미국이 카다피를 제거할 목적으로 군사개입을 했지만 현재와 같은 더 나쁜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패리는 1988년 미국 팬암103 여객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과 카다피의 민간인 학살 관련 사례로 이를 설명했다.
1988년 12월 런던발 뉴욕행 팬암 여객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갑자기 공중폭발해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259명 전원과 로커비 주민 11명 등 270명이 사망했다. 이 가운데 미국인은 189명이었다. 미·영 합동수사팀은 카다피의 소행으로 결론지었다.
1986년 독일 베를린 미군 전용 디스코텍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의 배후로 리비아를 지목해 공습을 단행하자 카다피가 보복 차원에서 팬암기 폭파를 지시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몰타 주재 리비아 정보요원 2명을 지목하고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이에 불응한 리비아는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았고, 결국 카다피는 1999년 용의자 알리 알메그라히를 스코틀랜드 법정에 넘겼다. 알메그라히는 2001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9년 8월 전립선암 말기 판정을 받아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돼 리비아로 돌아온 뒤 2012년 5월 20일 사망했다. 알메그라히 사망 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팬암기 사건 조작 가능성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커비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의혹은 알메그라히 사망 이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미 주류 언론들은 그동안 외면해 왔다고 패리는 지적했다. 사건의 증거는 사건 6개월 뒤 발견된 기기 파편과 셔츠 조각, 셔츠를 리비아 요원에게 팔았다는 몰타 상인의 증언뿐이었다. 더욱이 알메그라히를 기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몰타 상인은 미 법무부로터 200만 달러를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미 주류 언론들은 알메그라히가 로커비 폭파범이며 리비아에 참사의 책임이 있다는 미 정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4년부터 2011년 사망하기 전까지 유럽국가들과의 협의를 통해 아프리카·중동 난민의 유럽행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 / 가디언 웹사이트 캡처
미국 ‘테러와의 전쟁’ 후 난민 급증
컨소시엄뉴스는 아울러 미국이 리비아 동부가 반카다피 세력의 본거지이자 이슬람 무장세력의 주공급처라는 사실을 애써 간과해온 점도 지적했다. 동부지역이 무장세력의 공급처임은 미 육군사관학교 테러대처센터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났다. ‘이라크의 외국인 알카에다 전사’에 따르면 리비아 출신의 구성비율이 가장 높았다. 카다피 제거 결과 리비아는 서부의 트리폴리와 북동부 토브루크를 중심으로 하는 2개의 정부와 이슬람 무장세력 간 내전으로 무법천지로 바뀌었다. 특히 지난 3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언론 폭스뉴스 보도에 따르면 동부지역은 이슬람국가(IS)가 훈련캠프를 운영하는 등 북아프리카의 IS 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정상들은 참사 나흘 만인 4월 23일 난민 구조작전 지원예산 3배 확대, 밀입국 조직에 대한 군사작전 수행, 난민 5000가구에 거처 제공 등의 긴급 난민대책을 내놓았다.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2011년과 2014년 사이에 지중해를 건너다 사망한 이는 500% 이상 증가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아프리카·중동지역의 갈등으로 발생한 난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 난민은 5700만명으로, 2012년에 비해 600만명이 늘어났다. 리비아는 물론 많은 아프리카 국가의 국민들은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으로 혼란해진 정정 탓에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이 같은 미국의 세계 정책이 중단되지 않는 한 유럽으로 가려는 목숨을 건 난민 행렬은 끊이지 않을 터이고, 이들의 ‘죽음의 항해’를 막을 어떠한 대책도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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