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민중사>를 쓴 진보역사학자 하워드 진(1922~2010)은 26년 전 진보잡지 <프로그레시브>에 ‘공산주의’에 대해 쓴 적이 있다. 1948년 미 하원의 ‘비미국인활동색출위원회’는 ‘당신이 공산주의에 대해 알아야 할 100가지’라는 제목의 팸플릿을 배부했다. 이 위원회는 1938년에 나치 협력자 색출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는 공산주의자 색출로 변질돼 있었다. 팸플릿에는 100가지 질문과 답변이 기록돼 있었다. 진은 3개의 질문과 답을 예시한다. 예컨대 질문 76번은 이렇다. ‘일상생활 어디에서 공산주의자를 발견할 수 있을까.’ 답은 ‘당신이 다니는 학교, 노조, 교회 또는 민간단체에서 찾아보면 된다’이다.
하워드 진이 글에서 말하고자 한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산주의는 기괴하지만 심각한 여파를 몰아온 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반공주의가 대세일 때 공산주의라는 말은 합리적 대화를 불가능하도록 하고 “너 공산주의자지?”라는 말은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두 번째는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으로 누군가를 마녀사냥을 할 경우 역풍을 맞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을 겪으면서 누군가를 공산주의자라고 지목하는 사태에 대해 깊이 따져보게 됐다. 그 결과 미 정부의 니카라과 침공 주장을 국민은 지지하지 않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박정희 망령에 이어 매카시즘 망령마저 되살려내고 있다.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국정화 반대세력을 ‘적화통일론자’로 매도했고, 원유철 원내대표는 ‘북한 지령설’을 주장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이 수사를 촉구하자 황교안 국무총리는 “확인되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너무나 익숙한 레퍼토리라 놀랍지도 않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때 국정원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하고, 헌법재판소는 당을 해산시키지 않았던가. 주한 미국대사 피습 때 여권은 예의 종북세력 배후론을 주장했다. 놀라운 게 있다면 구태의연하게 반복하는 종북몰이가 아닐까. 다음 타깃이 누가 될지, 어떤 논리로 몰아갈지 궁금할 따름이다. 전교조가 타깃이 될 거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정부·여당의 국정화 세몰이는 마치 브레이크가 부서진 자동차 같다. 대통령은 거짓말을 하지만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하워드 진은 숨지기 7개월 전에 쓴 글에서 평화로운 세계, 전쟁을 반대하고 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행동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그는 “정치인들처럼 세상을 바라보면서 ‘타협을 해야만 해. 정치적 이유를 고려해 행동해야 한단 말이야’라는 식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 대신 우리의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하다. 우리가 정치인이 아닌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진보가 이뤄지고 부당한 질서가 무너진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으로 행동할 때 가능했다.… 권력에 있는 자들이 우리의 요구와 주장을 외면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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