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세력이 쏟아내고 있는 망발 가운데 파렴치의 극치는 무엇일까. 어떤 이는 ‘국정화 반대=비국민’ 발언을 해 검찰에 고발된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3일 대국민 담화에서 “(전체 학교의)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고 한 황교안 총리의 언급에 더 눈길이 간다. 황 총리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의 당위성을 설명하려고 검정 교과서 체제가 다양성을 훼손한다는 근거로 과거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을 예로 들다가 예의 망발을 했다. “전국 2300여개 고등학교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고, 나머지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 교학사 교과서만 정상적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이 말은 바꿔 말하면 0.1%는 정상이고 나머지는 비정상이라는 뜻이다. 황 총리의 언급은 엄밀하게 말하면 파렴치를 넘어 날조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 총리 발언을 주목한 이유는 거기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무언가를 발견해서다. 99.9와 0.1이라는 숫자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숫자로 상징됐다. 80대 20, 90대 10, 99대 1. 소득 불평등에 따른 사회 양극화를 상징한 이 숫자는 극소수가 대다수를 지배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웅변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 숫자 간 간극이 커지더니 마침내 99.1대 0.1이 됐다.
상위 1%가 99%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도 지극히 비정상인데, 0.1%가 나머지 99.9% 위에 군림하는 상황이라니. 그래서인가, 경고음이 쏟아졌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에서 일갈했다. “0.1%가 99.9%를 깔보고 비난하며 정신까지 지배하려 드는 게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든 근본 원인”이라고. 황 총리가 의식했든 아니든, 그의 발언은 0.1%가 99.9%에게 하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판단한다. 0.1%가 99.9%를 깔보는 나라.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하지만 이게 국정화 추진세력의 노림수가 아닐까.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국정 화두는 ‘비정상의 정상화’다. 이 말은 ‘비정상 상황을 정상으로 보게 만드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비아냥을 받아 왔다. 황 총리의 발언에서 다시 한 번 이 화두의 숨은 실체를 확인했다.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가른 뒤 숫자가 많은 ‘네 편’을 정신적으로 황량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자신이 이겼다고 여기는 수법 말이다. 루쉰은 <아Q정전>에서 이를 꼬집은 바 있다. 주인공 아Q가 동네 깡패들에게 얻어맞은 뒤 “나는 아들한테 맞은 격이다. 아들뻘 되는 녀석과는 싸울 필요가 없으니, 나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위하면서 힘없는 아이와 비구니에게 분풀이하는 근성을 일러 ‘정신승리법’이라고 했다. 논쟁에서 이기지 못할 게 뻔한데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밀어붙이려는 집권세력의 자세가 약 100년 전 아Q의 모습을 빼닮았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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