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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19]무엇이 잘못됐을까(2015.12.01ㅣ주간경향 1153호 )

어느 날 갑자기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들 배경에 청·백·적색의 프랑스 국기가 등장했다. 프랑스 국기는 페이스북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다. 프랑스 국기의 삼색은 각각 자유·평등·박애를 의미한다. 왕정 철폐와 시민국가의 탄생을 의미하는 프랑스 혁명 정신이 담겨 있다.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도 경기장과 의회 등에서 울려퍼졌다. 모두 ‘11·13 파리 테러’ 이후의 풍경들이다. 피로써 쟁취한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공격한 데 대한 분노이자, 희생자를 기리고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연대감의 표시다. 14년 전에도 그랬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가 알카에다의 여객기 테러로 공격당했을 때 전 세계인은 한마음으로 애도하고 연대를 표시했다. 14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11·13 파리 테러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하게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 뿌리는 9·11 테러에 있다. 9·11은 세계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정 종교를 전쟁의 대상으로 삼고, 국가가 아닌 무장세력과 전쟁을 벌이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알카에다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힌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 용의자를 잡기 위해 시민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애국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14년이 지난 지금, 테러의 주체가 알카에다에서 이슬람국가(IS)로 바뀌었을 뿐 테러와의 전쟁은 종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는 확산됐다. 국가안보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나라도 비단 미국만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9·11 이전보다 더 위험한 곳이 됐고, 민주주의는 약화됐다. IS의 테러는 결코 용서 받지 못할 일이지만 테러와의 전쟁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세계가 지난 14년간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11·13 테러 이후 전개될 상황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국가안보를 빌미로 시민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끊임없이 억압되고, 두려움의 문화가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평화의 목소리는 광기에 찬 보복의 목소리에 묻힐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혐오는 커질 것이고, 무슬림 수백만명은 삶의 터전을 등지고 환영 받지 못한 나라에서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다. 최악은 지금보다 더 참담한 세계 전쟁 상황이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연 프랑스의 분노는 어디를 향할까.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는 보복과 무장을 부추기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이런 내용이 담긴 국가를 향수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이 시대에 공공연하게 부르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기도 한다. 다른 나라 상황은 외면한 채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프랑스 국기로 바꾸는 데 대해 불편한 마음을 드러낸 이들도 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방식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 하지만 9·11이나 11·13 테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개인의 선의가 국가에 의해 왜곡되거나 이용당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