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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가 쓴 칼럼/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36]유권자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2016.04.12ㅣ주간경향 1171호)

“버니 샌더스가 72.7%를 얻었지만 나는 유권자들의 뜻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3월 26일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버니 샌더스가 워싱턴주 코커스(당원대회)에서 승리한 뒤 그 주 출신 하원의원 릭 라슨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글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유권자의 뜻을 존중해 샌더스 지지를 당부하는 글로 채워졌다. 흥분한 일부 지지자는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을 경우 낙선시키겠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샌더스는 워싱턴주 코커스에서 약 73%를 득표해 27%를 얻은 힐러리 클린턴을 압도적 표차로 이겼다. 특히 라슨이 속한 선거구에서의 샌더스 득표율은 81%나 됐다. 당연히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얻은 후보를 지지해야 하는 게 상식 아닌가. 그런데도 샌더스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라슨이 슈퍼대의원이기 때문이다. 슈퍼대의원은 상·하원 의원이나 주지사, 시장, 당 지도부 등으로 구성된다. 민주당에는 712명이 있다. 이들은 일반대의원과 달리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에서 경선 결과와 무관하게 원하는 후보에게 자유롭게 표를 던질 수 있다. 미리 지지 의사를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막판에 마음을 바꿔 다른 후보를 지지할 수도 있다. 워싱턴주의 경우 라슨처럼 클린턴이 패배했음에도 지지 의사를 사전에 밝힌 슈퍼대의원이 17명 가운데 대다수라고 외신은 전했다.

샌더스 지지자들로서는 뿔이 날 만하다. 3월 26일까지 치러진 35곳의 경선 성적은 15대 20. 샌더스가 클린턴에게 5곳을 뒤졌다. 확보한 일반대의원 숫자(리얼클리어폴리틱스 기준)는 980명 대 1243명. 샌더스가 263명 뒤져 있지만 경선 결과를 그럭저럭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슈퍼대의원 확보 숫자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31대 469로 클린턴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전체 대의원 확보 숫자 차는 701명으로 벌어진다. 샌더스는 3월 22일 아이다호주 코커스부터 서부에서 5연승을 거두는 등 상승세를 타고 있다. 더욱이 4월 5일로 예정된 위스콘신주 프라이머리(예비선거) 여론조사에서도 클린턴을 앞서고 있어 반전을 꾀할 수 있는 중대한 모멘텀을 맞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공화당의 유력 대선후보 3인과의 가상대결에서도 클린턴과 달리 모두 이기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괴리감 있는 현실을 깨는 길은 클린턴 지지 의사를 밝힌 슈퍼대의원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샌더스 진영이 슈퍼대의원 잡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이유다.

유권자들의 뜻을 좇아 샌더스 지지 입장을 드러낸 슈퍼대의원들도 여럿 나타났다. 모두 샌더스가 압도적으로 승리한 주들의 슈퍼대의원들이다. 하지만 샌더스 지지로 돌아선 슈퍼대의원들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클린턴은 2008년 대선 경선 초반에 버락 오바마에게 리드를 빼앗겨 슈퍼대의원을 잃은 아픔이 있다.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기적을 바라는 일이나 다름 없다. 유권자들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인들의 행태는 선거 때마다 계파 간 나눠먹기식 공천이 자행되는 한국만의 일은 아닌가 보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