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마감을 하루 앞둔 목요일 밤. 퇴근 버스에서 후배 여기자가 페이스북에 쓴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멎는 듯했다. “깜깜하고 까마득한 기분… 살아있다는 생동이 아닌 살아남았다는 생존, 내게는 자연스럽지 않은 다른 세계의 감각이었다. …지난 몇 주간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하게 이름 지을 수 있는 감각들이 무기력했고 슬펐고 무서웠다.” 공감의 표시로 ‘좋아요’를 어느 때보다도 꾹 눌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것뿐이었다.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많은 여성들이 날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악몽 속에 사는 동안 여성을 상대로 한 살인사건은 계속 일어나도 고작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다니. 그 직전에 또 다른 후배 여기자가 글을 올렸을 때도 같은 심정이었다. “내가 이 여교사였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먹먹하다.” 무기력함과 먹먹함. 그랬다. 약 한 달 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으로 움츠러들 대로 움츠러든 여성들은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으로 아예 숨조차 쉴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섬마을 여교사 성폭행 사건으로 참담함이 극에 달했을 때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두 건의 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미국 스탠퍼드대학 유명 수영선수의 성폭행 사건이었다. 사건은 지난해 1월 일어났지만 법원 선고가 지난 4일 있었다. 이 사건이 주목을 받은 건 피해 여성이 법정에서 읽은 장문의 글 때문이었다. 사건 이후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자신이 당한 상황과 심정을 담았다. 다른 하나는 25년 전 ‘데이트 강간(date rap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당사자가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는 글이었다. 시사주간 <타임>은 1991년 6월 3일자에 피해자 얼굴을 싣고 ‘데이트 강간’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글을 읽는 것은 고통이자 고문이었다. 가해자의 뻔뻔함과 당당함에 분노가 일었다. 동시에 경외감도 들었다.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자신이 당한 끔찍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두 여성의 용기 때문이었다.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격을 제대로 바라보려는 남성들이 많아지긴 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피해자로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여성들의 분노는 당연하다. 사건이 나기 직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현실문화)라는 책을 봤다.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에멀린 팽크허스트(1858~1928)의 자서전이었다. 팽크허스트는 참정권을 얻기 위해 폭력시위를 이끌었고, 이때 전투파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서프러제트’라고 불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싸우지 않고는, 폭력에 호소하지 않고는, 심지어 목숨을 버리지 않고는 편견과 모멸과 무관심에 대항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난 한국의 여성들 앞에는 깨부술 수 없는 견고한 편견과 무관심의 장벽이 놓여 있다.
25년 전 데이트 강간 피해 여성은 단호히 말한다. “아무도 내가 겪은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 스탠퍼드대 사건의 피해 여성은 이렇게 당부했다. “싸움을 절대 멈추지 말라.”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들이 보여준 것은 싸우겠다는 용기나 다름없다. 정녕 싸우지 않고도 여성들이 이기는 방법은 없는 걸까. 남성들이 앞장선다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남성들이 답할 차례다. 공감을 넘어 의견을 표출하고 행동으로 연대를 보여줄 때다. 여성들의 싸움을 멈추게 하는 길은 결국 남성들에게 달려 있다.
<조찬제 편집장 helpcho6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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