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원안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공약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소신이나 생각이 변했다면 판단력의 오류 아니겠느냐.” 2010년 1월 중순,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당시 한나라당에서 친이(친이명박)계와 친박(친박근혜)계의 갈등이 한창일 때 정몽준 대표와 박근혜 전 대표 간 논쟁이 벌어졌다. 정 대표가 불을 질렀다. 정 대표는 수정안에 반대하는 박 전 대표를 미생(尾生)에 비유했다. 미생은 고사성어에 나오는 인물이다. 애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가 오는데도 다리 밑에서 기다리다 익사해 흔히 융통성 없이 원칙만 고수하는 사람을 빗댈 때 원용된다. 발끈한 박 전 대표는 나흘 뒤 반격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 반대로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니냐. 미생은 진정성이 있었지만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는 것이다. 미생은 죽었지만 귀감이 되고 애인은 평생 괴로움 속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논쟁의 승자는 박 전 대표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원칙과 신의를 지키는 정치인으로 각인돼 3년 뒤 청와대에 입성했다.
몇 해 전 이야기를 끄집어낸 까닭은 최근 결론이 난 영남권 신공항 소동 탓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시작된 논란은 ‘김해 신공항’이라는 해괴한 결말로 끝났다. 이 과정을 돌이켜보면서 박근혜와 정몽준의 ‘미생지신(尾生之信) 논쟁’이 떠올랐다. 결론을 놓고 보면 박 대통령은 융통성과 신의의 원칙을 의미하는 미생지신의 의미 가운데 후자만 보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미생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소진열전’을 비롯해 <장자> ‘도척편’ 등에 나온다. 미생지신은 논란의 사자성어인 것 같다. 다른 문헌과 달리 <사기> ‘소진열전’의 주인공 소진은 미생을 신의 있는 인물의 대명사로 삼고 궤변을 펼친다. 현실주의자 공자에게 미생은 당연히 마뜩잖았다. 공자는 <논어> ‘공야장’에서 “누가 미생고(微生高·미생)를 정직하다 말하는가. 어떤 사람이 식초를 빌리려 갔더니 (살아 남기 위해 없다고 하지 않고) 이웃집에서 빌려다가그 사람에게 주었더라.” <사마천 한국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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