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유럽 역사는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간 견제와 균형의 역사였다. 네 나라가 서로 물고 물리면서 세력 균형자 노릇을 했다. 독일은 공포이자 비난의 대상이었다. 어느 누구도 강력한 독일도, 분열된 독일도 원치 않았다. 어떤 경우든 유럽의 세력 균형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독일 입장으로서는 영향력을 행사해도, 하지 않아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국제관계 속에서 형성된 ‘독일 딜레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독일 딜레마’ 속으로 뛰어들려는 걸까. 메르켈이 지난 28일 “유럽의 운명은 우리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한 발언을 보며 든 생각이다. 메르켈은 맥주파티 형식의 정당행사에서 “이것이 지난 며칠간 경험한 것”이라고 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및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단방위를 규정한 나토협약 5조 준수를 거부하고 파리기후협정을 반대한 데 대한 불만으로 해석됐다. 파장이 컸다. 유럽과 미국의 결별선언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외교협회(CFR) 리처드 하스 회장은 “분수령”이라고 표현했다.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 기드온 라흐만은 4개월여 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70년 된 대서양동맹에 의문을 품게 한 점 등을 들어 “메르켈의 실수”라고 했다.
메르켈 측은 다음날 진화에 나섰지만 파문이 가라앉을지 불투명하다. 분명한 것은 그의 발언이 맥주를 마시며 늘어놓을 넋두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정세를 분석한 끝에 내린 자신감의 표현일 수 있다. 영국은 지난해 유럽연합 탈퇴로 대륙에서 멀어졌다. 풋내기 정부 프랑스는 독일과 손잡고 러시아에 대항할 태세다. 미국은 유럽을 버리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의 몸속에서 세력 균형자로 나서야 한다는 욕구가 일렁이지 않을까.
실제로 유럽에서 독일의 영향력에 비례해 그의 위상은 높아가고 있다. 오는 가을이면 4선 총리도 가능하다.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나, ‘라인강의 기적’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에 견줄 만하다. 메르켈의 발언은 주워담을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나머지 국가 지도자들의 견제가 불을 보듯 뻔하다. ‘메르켈 딜레마’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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