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3·5합의’를 이끌어내자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성과를 깎아내리는 데 바빴다. 그는 3월7일 페이스북에 “남북회담 합의문을 보니 1938년 뮌헨회담을 연상시킨다. 당시 영국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의 수데테란트 합병을 승인해주고 유럽 평화를 이룩했다고 했지만, 이는 히틀러의 속임수에 불과했다”고 썼다. 28일에는 “문재인 정권의 위장평화쇼”라고 했다. 홍 대표가 남북 합의를 “속임수”와 “위장평화쇼”라고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문 대통령에게 ‘체임벌린 이미지’를 씌우기 위함이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까지 열리니, 안보를 강조해온 보수 야당으로서는 좌불안석일 터이다. 더욱이 두 회담에서 정전협정을 종전협정 등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은 상상조차하기 싫을 법하다.
홍 대표가언급한 체임벌린과 뮌헨협정은 20세기 국제관계사에서 실패의 대명사로 꼽힌다. 체임벌린은 1938년 9월29일 히틀러와의 세 번째 만남에서 체코 수데테란트를 넘겨주는 뮌헨협정을 체결했다. 1년 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협정은 휴지 조각이 됐다. 체임벌린은 조롱의 대상이 됐다. 그의 유화정책은 굴욕 외교의 상징으로 낙인찍혔다.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세 차례 회담을 노상강도에 비유했다. “처음에 상대는 권총을 뽑아들고 1파운드를 요구했다. 그걸 주니까 또다시 총을 꺼내들고 2파운드를 요구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파운드17실링6펜스를 받고서 나머지는 미래에 대한 호의의 약속이라고 둘러댔다.”
아이러니하게도 회담 결과에 대한 영국 내 반응은 뜨거웠다. 하루 뒤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평화선언 문서를 들고 귀국한 날은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도 공항은 환영 인파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는 총리 관저 현관에서 돌이킬 수 없는 말실수를 했다. 60년 전 디즈레일리 총리의 유명한 “명예와 평화를 가지고 독일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되풀이하라는 누군가의 권유에 충동적으로 해서는 안될 말을 내뱉었다. “우리 시대의 평화가 찾아왔다.” 실수임을 바로 깨달았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악몽이 됐다. 그 후 많은 지도자들은 전쟁의 명분으로 체임벌린을 이용했다. 2016년 <협상의 전략>을 쓴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군사개입은 언제나 독재자에게 놀아난 순진한 체임벌린에게 침을 뱉으면서 정당화됐고, 대화와 협상은 가짜평화라는 이름으로 조롱당했다.”
뮌헨회담의 실패는 나약한 평화주의자 체임벌린 탓만은 아니다. 그의 개인적 미숙함과 안이한 정세 판단, 전략 및 팀워크 부재 등 총체적 부실의 결과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뒤집어썼지만 승리는 연합군의 몫이었다. 전쟁을 막을 목적 하나로 히틀러를 세 번이나 만난 그는 죽기 전 말했다. “뮌헨이 없었다면 우리 제국은 1938년에 파괴됐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처음 체임벌린의 회동 제의를 받은 히틀러도 당황했다. 체임벌린이 전쟁을 위협하러 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결국 체임벌린과의 만남은 이미 전쟁을 결심하고 있던 히틀러의 마음을 돌렸다. 히틀러는 패배 직전 “1938년 전쟁을 시작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지난해 5월 집권한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모든 걸 걸었다. 그 결과물이 4월27일 남북정상회담이다. 문 대통령의 역할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공동합의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상회담은 그 이후가 중요하다. 국민과 야당을 설득하는 일이다. 체임벌린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유화정책이 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데이비드 레이놀즈 교수는 뮌헨협정을 비롯해 20세기를 만든 6개 회담을 분석해 펴낸 <정상회담>에서 회담은 유화-억제-데탕트-변모 단계로 진행돼왔다고 분석했다. 남북정상회담 과정도 그랬다. 2000년과 2007년은 유화단계였다. 2008년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 유화단계는 억제단계가 됐다. 문 정부 출범 후 긴장완화 단계를 거쳐 변화 단계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체임벌린이 히틀러를 만난 시간은 9월13일부터 29일까지 보름 남짓이다. 하지만 그는 8월 말 비밀리에 히틀러를 단독으로 만나는 ‘Z계획’을 짰다. 이 때문에 함께 히틀러를 만나자는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체임벌린은 1940년 11월9일 눈을 감았지만 ‘체임벌린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사후 80년이 다 되도록 유령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문재인의 시간’은 달라져야 한다. 사후 역사가 평가할 때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모토 ‘평화, 새로운 시작’처럼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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